욥4:1-11 옳은 말이라도 찬송:285장

4:1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대답하여 이르되

4:2 누가 네게 말하면 네가 싫증을 내겠느냐, 누가 참고 말하지 아니하겠느냐

4:3 보라 전에 네가 여러 사람을 훈계하였고 손이 늘어진 자를 강하게 하였고

4:4 넘어지는 자를 말로 붙들어 주었고 무릎이 약한 자를 강하게 하였거늘

4:5 이제 이 일이 네게 이르매 네가 힘들어 하고 이 일이 네게 닥치매 네가 놀라는구나

4:6 네 경외함이 네 자랑이 아니냐 네 소망이 네 온전한 길이 아니냐

4:7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4:8 내가 보건대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

4:9 다 하나님의 입 기운에 멸망하고 그의 콧김에 사라지느니라

4:10 사자의 우는 소리와 젊은 사자의 소리가 그치고 어린 사자의 이가 부러지며

4:11 사자는 사냥한 것이 없어 죽어 가고 암사자의 새끼는 흩어지느니라

오늘 말씀은 엘리바스가 욥에게 권면하는 내용의 말씀입니다.

  1. 1-6절은 엘리바스의 1차 변론의 시작입니다.

욥을 향해 드디어 그의 세 친구들의 본격적인 변론이 시작됩니다. 오늘은 제일 먼저 세 친구 가운데 최연장자로 보이는 앨리바스의 변론이 소개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본 단락은 앞에서 나타나고 있는 욥의 탄식에 대해 엘리바스가 책망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즉 여기에서 엘리바스는 이전에 여러 사람을 교훈하고 격려하였던 욥이 자기 자신의 고난 앞에서는 심히 연약하고 절망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 것에 대해 책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그토록 연약하고 절망적인 모습을 보이는 욥의 행동은 결국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소망을 상실하고 있는 것이라는 비난이 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욥에 대한 엘리바스의 책망은 이미 위로자로서의 본분을 망각한 처사입니다. 물론 여기에서 엘리바스가 지적하고 있듯이, 욥이 남을 교훈하고 격려했던 것만큼 자신을 스스로 위로하지 뭇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엘리바스가 한 가지 간과하고 있는 것은 실제로 사람들 모두에게는 자기 자신에게 닥치는 고난만큼 절박하고 심각한 것이 없으며 자기 자신을 스스로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만큼 힘든 일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엘리바스가 이러한 연약한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를 가졌다면 진정으로 취해야 할 자세는 냉혹한 비난과 책망에 앞서 실로 애정 어린 위로와 격려일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바스는 욥의 결점을 드러내고 책망함으로써 욥의 상처를 더욱 크게 하고 그만큼 고통을 더하게 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역설적으로 참된 위로자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고통당하는 자의 고통을 자기 것으로 생각하고 아픈 곳을 감싸주며 소망을 줄 수 있는 말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진실로 우리의 삶에 있어서 이러한 위로자의 역할을 환전하게 수행하시는 분은 우리의 모든 사정을 아시며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죄에서 구하시기 위해 자기의 목숨까지 바치신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슬픔이 있을 때 더욱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그 앞에 나아가 위로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1. 7-11절은, 엘리바스의 고난에 대한 인과 응보론적 해석입니다.

엘리바스는 핵심 소재가 되는 쟁점인 고난의 원인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힙니다. 엘리바스는 지극히 현세론적이고 기계적인 인과 응보론에 입각해 현세에서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의 원인이 죄에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에 따르면 이 세상에서 악인은 반드시 그에 마땅한 보응으로서 멸망에 처해지게 되며 의인은 결코 끊어짐이 없이 흥왕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기에 이 세상에서 발생하는 모든 고통과 열악한 상황은 모두 죄에 대한 결과로서, 욥이 당하는 고난 또한 그렇게 해석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엘리바스는 지금 욥의 고난을 죄의 결과로 몰아 부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난의 원인에 대한 이러한 엘리바스의 해석은 하나님의 깊고 오묘한 섭리 하에서 깨달아야 하는 복잡다단하며 심오한 삶의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지 못한 것이며, 또한 하나님의 공의에 입각한 종말론적이고 최종적인 인과응보의 원리를 지극히 현세적이고 기계적으로 적용한 편협된 주관과 독단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사실 의인에게는 축복이, 그리고 악인에게는 멸망이 주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에 입각한 절대 불변의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현세에 완전히 완성되는 것이 아니며 보다 최종적 이고 종말론적으로 완성되는 원리인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필요에 따라 당신의 공의를 보이시기 위해 현세에서 악을 즉각적으로 심판하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예표에 불과하며 선과 악이 완전히 구별되어 하나님의 공의로운 보응을 받는 것은 최후 종말의 때인 것입니다.

이러한 면에서 볼 때 욥이 당하는 고난에 대한 엘리바스의 해석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주권적 섭리를 온전하게 깨닫지 못하고 인과응보의 원리를 욥이란 특수한 상황에 있는 한 개인에게 너무 성급히 적용시킨 데서 발생한 오류라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엘리바스의 견해는 이후 나머지 친구들과 엘리후의 변론에서도 그대로 나타나 욥에게 정신적인 고통까지 더하는 요인이 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는 교훈은?

엘리바스는 지금 욥이 죄를 지었기에 고난을 당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 그의 이론도 결코 옳은 것이 아니며, 특별히 우리에게는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할 아무런 권세가 없고 능력도 없습니다. 우리가 눈으로 보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지극히 부분적이고 불완전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특히 우리가 보기에 죄가 없고 정직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의로우심 앞에서 완전히 의롭다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에 우리 모두는 똑같이 죄인이고 불완전한 자들로서 서로를 판단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또한 죄가 없고 정직한 자라 할지라도 이 땅에서 때때로 고난이 없을 수 없고 결코 죽음을 피할 수는 없는 것이기에 우리는 어려움에 처해 있고 죽음의 위협을 당하는 자들을 경솔히 정죄해서도 안 됩니다.

오히려 우리에게는 남들을 판단하기에 앞서 이해하고 위로해 주는 일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며, 남들을 정죄하기에 앞서 용서하고 사랑하는 일이 강하게 요청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모두 판단보다는 위로하고 사랑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찬송:36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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