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22:1-11 네 악이 크지 아니하냐 찬송:279장

22:1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대답하여 이르되

22:2 사람이 어찌 하나님께 유익하게 하겠느냐 지혜로운 자도 자기에게 유익할 따름이니라

22:3 네가 의로운들 전능자에게 무슨 기쁨이 있겠으며 네 행위가 온전한들 그에게 무슨 이익이 되겠느냐

22:4 하나님이 너를 책망하시며 너를 심문하심이 너의 경건함 때문이냐

22:5 네 악이 크지 아니하냐 네 죄악이 끝이 없느니라

22:6 까닭 없이 형제를 볼모로 잡으며 헐벗은 자의 의복을 벗기며

22:7 목마른 자에게 물을 마시게 하지 아니하며 주린 자에게 음식을 주지 아니하였구나

22:8 권세 있는 자는 토지를 얻고 존귀한 자는 거기에서 사는구나

22:9 너는 과부를 빈손으로 돌려보내며 고아의 팔을 꺾는구나

22:10 그러므로 올무들이 너를 둘러 있고 두려움이 갑자기 너를 엄습하며

22:11 어둠이 너로 하여금 보지 못하게 하고 홍수가 너를 덮느니라

오늘 말씀은 엘리바스의 3차 변론의 개시의 말씀입니다.

그 내용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는 실로 무익한 존재이며 욥의 고난이 그의 죄로 인함임을 밝히며 욥을 정죄합니다.

엘리바스는 1-3절에서,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의 연약함과 무익함을 전제로 하여서, 4-9절에 욥이 일반적인 부자들이 범하기 쉬운 죄를 범한 것으로 매도하고, 10,11절에서 그러한 죄로 인해 악인이 멸망당하는 인과 응보의 법칙에 따라 욥에게도 고난이 임하게 되었음을 단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엘리바스의 욥에 대한 정죄는 앞의 두 차례의 변론이 보다 간접적이고 비유적으로 욥이 당하는 고난의 원인이 그의 죄에 있음을 밝히던 것에 비해 이번에는 직접적이고 단정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 앞의 두 변론에서와 같이 편협하고 도식적인 현세적 인과응보론의 잘못된 단순 논리에만 계속 매달려 욥을 정죄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데, 그러다 보니 논리적 모순과 지나친 억측을 낳고 말았습니다.

즉 본문에서 엘리바스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실로 무익한 존재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행위 또한 하나님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는 무관한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는 인간의 행위에 따른 하나님의 인과 응보적 보응이라는 지금까지 계속하였던 엘리바스의 핵심적인 주장과도 논리적 모순을 낳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본문에서 엘리바스가 열거하고 있는 욥의 죄 악상들은 사실과 다른 억측에 근거한 것으로서, 오히려 욥은 이런 죄악에서 떠나 의로운 일을 행하던 자였습니다. 이에 욥은 이후 자신의 변론에서 이러한 엘리바스의 잘못된 정죄에 대해 자기변호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는 교훈은?

욥의 친구들은 욥을 위로하러 왔는데, 우리를 받기는커녕 욥을 더욱 힘들게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이 엘리바스의 세 번째 변론 또한 욥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로 오히려 욥을 힘들게 하였습니다. 그 이유를 통해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엘리바스의 변론이 욥을 힘들게 한 것은 ‘그릇된 전제’를 세웠기 때문입니다

4절에 보면, 엘리바스는 욥이 고난받는 것이 그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증명한다는 자기의 주장을 더욱 강화시키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엘리바스가 하나님의 섭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곧 고난은 죄의 결과이고, 현재 욥은 고난을 받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욥은 죄를 범했다는 논리를 엘리바스는 펴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고집스런 신념을 무리하게 적용시키기 위해 그릇된 전제를 내세웠습니다. 진정한 위로자라면 욥이 처한 고난의 자리에서 묵묵히 그저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고 구원의 은총을 구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 엘리바스의 변론이 욥을 힘들게 한 것은 ‘순전한 자를 정죄’했기 때문입니다.

6절에 엘리바스는 부당하게 가난한 자를 압제하고 과부와 고아를 학대하는 파렴치한 죄를 욥이 저질렀다고 고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욥은 엘리바스가 지적하는 것과 같은 죄를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욥은 구제와 선행에 앞장섰던 순전하고 후덕한 인물이었습니다. 결국 엘리바스는 자신의 논지를 관철시키기 위해 순전한 욥을 가장 파렴치한 자로 모함하고 정죄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예 없는 죄까지도 만들어서 욥을 비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엘리바스처럼 남을 위로하는 위로자가 아니라, 오히려 없는 것도 만들어 내서 고통받는 자를 더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람들은 신앙의 연륜이 깊어갈수록 자기주장이 강해지고 독선적인 성향을 띠기 쉽습니다. 그러나 신앙 연륜이 깊어 갈수록 자아가 강해지기보다는 우리 속에 거하시는 그리스도 예수의 주권이 높아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때 우리는 엘리바스처럼 교만의 길로 들어서고, 그릇된 신념을 고집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웃의 아픔을 쉽게 판단하여 버리고, 정죄의 칼날을 들이대기 쉽습니다. 우리는 신앙의 연륜이 깊어갈수록 긍휼과 자비의 심정으로 이웃의 아픔에 함께 동참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든 자기주장을 절대화한다든지, 자기 논리나 자기 합리화의 도구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진정한 위로자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찬송:21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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