슥7:1-7 금식보다 순종을 원하시는 하나님

7:1 다리오 왕 제사년 아홉째 달 곧 기슬래월 사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스가랴에게 임하니라

7:2 그 때에 벧엘 사람이 사레셀과 레겜멜렉과 그의 부하들을 보내어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고

7:3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있는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에게 물어 이르되 내가 여러 해 동안 행한 대로 오월 중에 울며 근신하리이까 하매

7:4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7:5 온 땅의 백성과 제사장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칠십 년 동안 다섯째 달과 일곱째 달에 금식하고 애통하였거니와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7:6 너희가 먹고 마실 때에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먹고 너희를 위하여 마시는 것이 아니냐

7:7 예루살렘과 사면 성읍에 백성이 평온히 거주하며 남방과 평원에 사람이 거주할 때에 여호와가 옛 선지자들을 통하여 외친 말씀이 있지 않으냐 하시니라

오늘 말씀은 금식에 대한 질문과 이에 대한 답변으로서의 위선에 대한 책망의 말씀입니다.

2절과 3절에 보면 벧엘 사람들의 질문이 나옵니다. 이 벧엘은 북왕국 사마리아 때에 금송아지를 세웠던 곳으로, 남왕국 유다보다 약 100년이나 먼저 앗시리아에 망하여 이방인에 흡수되어 사라진 자들입니다. 그런데 에스라 2:28을 보면 유다 족속이 바벨론 포로에서 예루살렘으로 귀환할 때 벧엘과 아이 성 사람들이 223명이나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지난 70년 동안 북왕국 사마리아가 아니라 남왕국 유다가 망한 때를 애곡하며 금식을 해 왔다고 말하면서 이 금식을 앞으로도 계속 해야 하는지를 묻습니다. 이들은 자기들이 예루살렘 멸망을 애곡하는 5월의 금식을 지난 70년 동안 지켜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벧엘 사람들이 5월의 금식을 앞으로 계속 지켜야 하느냐고 묻는 것은, 자기들이 지난 70년 동안 이 절기를 지켜왔다는 것을 유다 족속에게 자랑하기 위해 한 말입니다. 그들은 아직도 여전히 이방인의 신인 우상을 섬기고 있는 중에 단지 예루살렘이 망했던 5월의 금식을 하나 더 지키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 금식이 나를 위한 것이냐?”고 물으십니다. 이는 이들이 금식한 것은 진정으로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들은 포로 신세가 된 자신들의 처지가 비참하게 느껴졌기 때문에 통분하는 마음으로 금식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들이 금식을 계속해야만 되는지에 관한 질문 그 자체가 무의미함을 이처럼 말씀하신 것입니다. 만약 오늘날에도 금식과 같은 의식적 행위의 참된 의미를 도외시한 채 그저 자신의 신앙심을 자랑하기 위한 방편으로 내 세우거나 자기 만족감을 채우는 방편으로 삼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크게 잘못된 일입니다. 어떤 목사님은 명함에 아예 이렇게 인쇄를 하신분이 있습니다. 40일 금식 몇 번. 그렇다면 잘못된 금식입니다.

6절의 말씀에 “너희가 먹고 마실 때에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먹고 너희를 위하여 마시는 것이 아니냐”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되물으십니다. 이것은 금식의 절기를 지키는 것보다 그들이 먹고 마실 때의 행동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먹고 마실 때는 우상을 섬기고, 연약한 자를 불쌍히 여기라는 하나님의 말씀도 전혀 듣지 않고 있으면서 단지 금식의 절기는 지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어진 하나님의 답변은 금식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지키는 자의 마음가짐이 중요하다는 교훈으로 위선적인 의식주의를 배격할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교훈은 성전 재건의 촉구라는 스가랴가 백성들을 향해 선포한 메시지의 주제에 실질적인 가치를 부여합니다. 즉 성전 재건이나 금식의 실시 등이 그 자체로서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순종과 실천이란 측면에서 가치를 지닌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전이 아름답게 건축되고 종교 행위로서 금식이 엄숙하게 실시된다고 할지라도 이것이 하나님을 위한 종교 행위가 아니라 스스로의 종교적 만족을 위한 형식적인 종교 행위였다면 이는 오히려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가중한 범죄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형식적인 종교 생활은 오히려 영혼을 피폐케 한다는 중요한 영적 진리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숙한 성도는 하나님이 명하시는 바를 명심하고 이를 힘써 실천하되 위선에 빠지지 않도록 항상 경성하는 자세를 지녀야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교훈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말씀이 삶에서 실천되기를 원하셨지만, 사람들은 그것 보다는 보이는 예식을 더욱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는 한 마디로 모순적인 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예배와 삶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1주일의 삶이 바른 자가 예배드릴 때 그 예배가 받아들여지고, 예배를 바르게 드린 자가 한 주간의 삶도 바르게 살아갑니다. 예배와 삶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배를 바르게 드리지 못한 자가 신실하고 바른 삶을 살아갈 수 없고, 삶이 바르지 않은 자가 하나님께서 받으실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설령 그가 드린 예배가 예식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더라도 그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거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참된 예배는 예배의 절차가 잘 진행되었느냐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드리는 자의 마음에 무엇이 담겨 있느냐 하는 것에 달려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모두 생활 따로 예배 따로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참된 예배를 드리고 일상생활에서도 하나님께서 받으실 신실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찬송:27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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