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24:1-12 부활하신 예수님 526장

24:1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24:2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

24:3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24:4 이로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24:5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24:6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24:7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24:8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24:9 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알리니

24:10 (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그들과 함께 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알리니라)

24:11 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24:12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부려 들여다 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놀랍게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

오늘 말씀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내용의 말씀입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는 일은 고금동서에 없었습니다. “네가 정녕 죽으리라”고 하신 말씀에 따라, 육신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난 아담의 후손은 죄 값으로 죽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은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서 다시 일어나신 것입니다. 그는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부활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예수님이 왜 부활하셔야 했었는가에 대하여 알아야 하겠습니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빛과 생명으로 오신 분입니다. 빛은 하나님이요, 어둠은 사망입니다. 빛은 언제나 어두움을 이길 수밖에 없습니다. 생명은 하나님의 생명을 말합니다. 모든 생명의 근원을 의미합니다. 이 생명은 사망에 삼킨바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둘쩨는, 예수님은 죄가 없는 분입니다. 사망은 죄의 대가로 찾아온 것입니다. 사망의 권세는 죄에게만 미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는 사망의 권능이 미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왔으며 그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왕 노릇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담의 자손이 아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사망의 지배에서 벗어난 사망의 치외법권 자이심으로 죽음에 머물러 계실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에 올라가실 때 가슴을 치며 울며 따르는 많은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십자가에서 일어난 사건을 끝까지 지켜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요셉이란 사람이 예수님의 시체를 자기 무덤 안에 장사지내는 것까지 낱낱이 보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신 날은 예비일 이었습니다. 안식일 전날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안식일을 쉬기 위한 예비일로 유대인들은 이 날에 안식일에 쓸 모든 일을 마련해 두었습니다. 이 여인들도 예비일에 주님의 시신에 바를 향품과 향유를 준비한 것입니다. 지루했던 안식일의 밤이 지났습니다. 이날 밤을 뜬눈으로 세운 이들 일단의 여자들은 새벽에 이르자 전날에 예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달려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여인들의 주님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무덤에 이르자마자 사태의 변화에 심히 놀라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무덤 입구를 막은 무거운 돌이 제자리에서 굴려 옮겨져 있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 무덤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시체가 뉘였던 자리에 안치돼 있어야 할 시신이 보이지 아니한 것입니다. 이를 인하여 그들은 깊은 근심에 싸이게 되었습니다. 이제 죽은 시체까지 없어졌으니 그들의 실망이야말로 어떠했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더 좋은 것을 바라보지 못하고 우리의 가진 것을 잃었을 때 상심하고 절망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깊은 섭리를 안다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진 것은 걱정거리인 것이 아니라 그의 살아나신 일이기 때문에 오히려 큰 기쁨이 된 것입니다.

낙심 중에 있는 여자들에게 빛난 옷을 입은 두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이 천사는 주님의 부활의 증인으로 이 여인들에게 보내심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그를 찾는 자에게 나타내 주시는 것입니다.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댄 여인들에게 천사들은 이처럼 말씀했습니다. 5절 하반절부터죠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천사는 여인들이 찾는 분이 누구인지 알고는 그들이 찾는 자리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산 자를 죽은 자 중에서 찾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천사는 여자들에게 주님의 말씀을 기억나게 해주었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제자들에게 여러 번 당신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말씀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때 여자들은 주님의 말씀이 상기되어 지난날 주님이 하신 말씀을 깨닫게 되었고 그 말씀에 대한 믿음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이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말씀을 듣는 일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성령께서는 그 말씀을 상기 시켜 깨닫게 해 주실 때가 있는 것입니다.

이 여인들은 주님의 부활의 증인들이 되었습니다. 말씀으로 깨닫고 믿는 사람만이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증거를 받은 다른 제자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렸다고 했습니다. 허탄하다는 말의 원어의 뜻은 잡담처럼 혹은 농담처럼 들렸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날에도 예수님의 부활은 결코 이성적인 사고나 합리적인 사고로 이해할 수 없으며 오직 성령께서 주시는 온전한 믿음을 통해서 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 적극적인 믿음의 소유자인 베드로가 일어나 무덤에 달려갔습니다. 그 사실 여부를 알아보려는 것이었습니다. 가보니 과연 세마포만 보이고 시체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 같은 일을 목격하고는 기이히 여기며 집으로 달아갔다고 했습니다. 천사가 그들에게는 나타나지 아니했습니다. 여자들의 증거를 의심함으로 받아들이지 아니하는 베드로에게 다른 증거를 보이시기를 거절하신 것입니다. 다만 그는 기이히 여겼을 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행사를 기이히 여기는데 그치지 말고 말씀의 증거를 믿는 신앙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는 교훈은?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믿지 못합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의 죄를 사하시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그 후에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 승리하셨다는 사실을 분명히 믿으십니까? 우리는 이것을 단순히 머리로 믿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믿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신앙이 나에게 힘과 기쁨과 소망이 된다고 고백하면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우리에게 이 ‘부활신앙’이 있다면 우리는 죽음도 불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죽어도 다시 살기 때문’입니다. 악인은 심판을 받기 위하여 다시 살 것이지만, 믿음으로 의인 된 자들은 주님과 함께 왕 노릇하기 위하여 다시 살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환경에서도 승리할 수 있는 부활 소망을 가지고 이땅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찬송:16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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