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하19:1-10 다시 일어서다 찬송:315장

19:1 어떤 사람이 요압에게 아뢰되 왕이 압살롬을 위하여 울며 슬퍼하시나이다 하니

19:2 왕이 그 아들을 위하여 슬퍼한다 함이 그 날에 백성들에게 들리매 그 날의 승리가 모든 백성에게 슬픔이 된지라

19:3 그 날에 백성들이 싸움에 쫓겨 부끄러워 도망함 같이 가만히 성읍으로 들어가니라

19:4 왕이 그의 얼굴을 가리고 큰 소리로 부르되 내 아들 압살롬아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니

19:5 요압이 집에 들어가서 왕께 말씀 드리되 왕께서 오늘 왕의 생명과 왕의 자녀의 생명과 처첩과 비빈들의 생명을 구원한 모든 부하들의 얼굴을 부끄럽게 하시니

19:6 이는 왕께서 미워하는 자는 사랑하시며 사랑하는 자는 미워하시고 오늘 지휘관들과 부하들을 멸시하심을 나타내심이라 오늘 내가 깨달으니 만일 압살롬이 살고 오늘 우리가 다 죽었더면 왕이 마땅히 여기실 뻔하였나이다

19:7 이제 곧 일어나 나가 왕의 부하들의 마음을 위로하여 말씀하옵소서 내가 여호와를 두고 맹세하옵나니 왕이 만일 나가지 아니하시면 오늘 밤에 한 사람도 왕과 함께 머물지 아니할지라 그리하면 그 화가 왕이 젊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당하신 모든 화보다 더욱 심하리이다 하니

19:8 왕이 일어나 성문에 앉으매 어떤 사람이 모든 백성에게 말하되 왕이 문에 앉아 계신다 하니 모든 백성이 왕 앞으로 나아오니라 이스라엘은 이미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였더라

19:9 이스라엘 모든 지파 백성들이 변론하여 이르되 왕이 우리를 원수의 손에서 구원하여 내셨고 또 우리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나 이제 압살롬을 피하여 그 땅에서 나가셨고

19:10 우리가 기름을 부어 우리를 다스리게 한 압살롬은 싸움에서 죽었거늘 이제 너희가 어찌하여 왕을 도로 모셔 올 일에 잠잠하고 있느냐 하니라

오늘 말씀은 요압이 압살롬의 죽음으로 인해 비탄에 잠겨 있는 다윗에게 국정에 소홀함이 없도록 충고하는 내용과 다윗의 환궁을 위한 논의에 대한 말씀입니다.

앞장에서 압살롬의 반역이 수포로 돌아가므로 다시금 다윗 왕국이 회복될 수 있게 되었음을 말씀합니다. 그에 이은 본장은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환궁하게 된 데 따른 일련의 사건들을 보여 주는 부분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본문은 요압이 압살롬의 죽음으로 인해 비탄에 잠겨 있는 다윗에게 국정에 소홀함이 없도록 충고하는 장면의 말씀입니다.

사실 압살롬의 죽음은, 이스라엘 전체의 입장에서 볼 때는 반역자의 종말이었지만, 다윗 개인의 입장에서는 자기 아들을 잃은 것이었습니다. 더욱 이 그 아들의 죽음이 자기 죄에서 기인한 것임으로 여긴 다윗은 더욱 슬픔을 가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내 아들 압살롬아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하면서 비통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자신의 죄과로 인해 운명 공동체인 이스라엘에 분열과 싸움이 있었다는 명백한 사실로 인해, 비록 그 싸움에서 승리했다 해서 기뻐 할 수 있는 상황은 더욱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한 나라의 국정을 책임지고 있는 그가 어느 때까지 슬픔과 비탄에 잠겨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압살롬에 대한 그의 지나칠 정도의 애착은 그를 위해 생명을 바칠 각오로 전쟁에 임한 병사들을 민망케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따라서 그는 지난날과 같이 압살롬의 죽음에 대해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공의를 인정하고 순복해야 함이 옳았습니다.

그러한 점에서 요압의 충고는 매우 시기 적절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만일 요압의 충고가 아니었다면 다윗은 여전히 슬픔에 잠겨 자기 임무를 소홀히 했을 것이며, 결국 백성들에게 거센 반발을 받았을 것입니다.

요압은 다음과 같이 다윗에게 충고를 합니다.

첫째로, 요압은 다윗이 왕 자신과 왕의 가족과 왕의 처첩들을 구원해 준 그의 부하들을 부끄럽게 하고 있다고 책망합니다. 요압의 말대로 다윗의 부하들은 지금 마치 자기들이 무슨 죄를 짓고 온 것처럼 부끄러움을 가지고 슬며시 마하나임 성문을 들어왔습니다.

둘째로, 요압은 왕이 자기를 미워하는 자는 사랑하고 자기를 사랑하는 자는 미워하고 있다고 책망했습니다. 이것 역시 맞는 말입니다. 반란군의 수괴인 압살롬의 죽음을 슬퍼하며, 그 반란군을 물리친 부하들에게는 부끄러움을 주고 있으니 요압이 이런 말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그리고 요압은 마지막으로 다윗에게 결정타를 날립니다. 반란군인 압살롬이 살고 다윗의 부하인 자기들이 모두 죽었다면 오히려 왕이 기뻐했을 뻔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요압은 이제 슬픔을 거두고 백성들 앞에 나가서 잘 싸워 이긴 그의 부하들을 격려하고 위로하라고 말합니다. 개인적인 슬픔을 거두고 백성들의 마음을 다스리라는 것입니다.

다행히도 다윗은 요압의 충고를 듣고 본연의 임무를 다시 수행함으로써 혹시라도 있을 수 있는 불상사를 막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옳은 충고는 굽을 길을 곧게 하고, 잘못된 길에 들어선 자를 그 길에서 돌이키게 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피차의 잘못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권면해 주어야 하고, 또한 권면을 받은 자는 권면하는 자의 조언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9,10절은 이스라엘 각 지파들이 압살롬의 반역이 진압되자 다윗을 예루살렘으로 환궁시키려고 논의합니다. 이는 다윗을 다시 왕으로 모시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는 교훈은?

압살롬의 죽음으로 인한 다윗의 슬픔은 그로 하여금 한동안 하나님과 그의 백성에 대한 의무를 인식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죽음을 무릎 쓰고 다윗을 위해 싸운 백성들이 죄인같이 취급되어 그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때 요압은 신하로서 왕과 국가와 백성들을 위하여 다윗 왕에게 충고를 하였습니다. 이에, 요압의 현명한 충고를 통하여 다윗 왕은 새롭게 마음을 가다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감정에 휩쓸려 언제고 슬퍼하기만을 원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감정에 휩쓸리면 잘못된 판단을 하기 쉽습니다.

그러기에 지도자는 사적인 문제로 생기는 밝거나 어두운 감정을 자제하여 그것을 대중 앞에 드러내지 말아야 함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바로 모든 백성을 대표하는 공적인 인물로서 그에 따라 백성들의 사기가 좌우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개인적인 어떤 것 보다는,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깊이 생각 하고 행동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찬송:40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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