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26:47-58 붙잡히신 예수님 269장
26:47 말씀하실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칼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26:48 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이르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한지라
26:49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26:50 예수께서 이르시되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신대 이에 그들이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
26:51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의 하나가 손을 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26:52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26:53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26:54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
26:55 그 때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칼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26:56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26:57 예수를 잡은 자들이 그를 끌고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가니 거기 서기관과 장로들이 모여 있더라
26:58 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가서 그 결말을 보려고 안에 들어가 하인들과 함께 앉아 있더라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파송된 큰 무리에 의해 예수님께서 붙잡히신 내용의 말씀입니다.
- 47-49절은, 가룟 유다의 배신의 입맞춤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를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함께 일어나 가자고 말씀하실 때에 가룟 유다가 저쪽에서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검과 몽치로 무장한 큰 무리를 이끌고 예수님을 붙잡으러 옵니다. 가룟 유다는 자기가 입을 맞추는 자가 예수님이라고 말하고는 예수님께 입을 맞추니 그 무장한 무리들이 예수님을 붙잡습니다.
이 검과 몽치로 무장한 사람들을 요한복음 18:3에서는 이때 온 사람들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 여기서 ‘군대’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당시 로마 군대의 1개 중대가 200-300명쯤 되므로 이 때 약 200명 정도의 로마 군사들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아랫사람등으로 약 500-600명의 군사들이 무기를 들고 예수님을 붙잡기 위해 왔다고 학자들은 봅니다. 여기에서 ‘몽치’는 나무로 만든 무기인 우리로 말하면 야구 방망이와 같은 나무 방망이를 말하며 이것을 든 자들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아랫사람일 것이고, 검을 가진 자들은 로마의 군사들 이었을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이들을 데리고 와서 자신이 입맞추는 자가 예수님이라고 서로 신호를 정했습니다. 당시 입을 맞추는 것은 보통 뺨이나 목, 혹은 손에 했습니다. 부모나 자녀, 형제와 자매, 친척이나 친구와 같은 가까운 사이에 나누는 당시에는 널리 행하여진 흔한 인사법이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사용된 헬라어 ‘카테필레인’이란 단어는, 애인과 같이 아주 사랑하는 자에게 하듯 반복해서 입을 맞추는 행위를 말합니다.
이렇게 신호를 맞추는 유다는 49절에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라고 말씀한대로 음흉한 입맞춤을 합니다. 지난번에 말씀을 드렸듯이 이렇게 유다는 언제나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겉으로는 웃으면서 예수님에게 문안 인사를 드리지만, 속은 예수님을 은 30냥에 팔아 버리는 마음이 숨겨져 있었던 것입니다.
가룟 유다의 간교하고 음흉스런 인사를 받은 예수님은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자 함께 온 무리가 예수님을 체포하였던 것입니다.
- 50-58절은, 잡히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그 때 예수님과 함께 있던 자 중의 한 사람이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그 귀를 떨어뜨립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이 사람을 베드로라고 증거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붙잡히시자 제자들이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검과 몽치에 대항치 않으시고 순순히 그들의 손에 잡히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주시는 쓴잔을 드시기로 하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교훈은?
스스로 붙잡히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그 곳으로 오셨고, 스스로 붙잡히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지금이라도 아버지께 구하여 하늘에 있는 천사들을 모두 동원하실 수 있는 권세를 가지신 분이지만, 그 권세를 사용하지 않고, 연약한 보통의 사람들처럼 순순히 그렇게 포박을 당하고 끌려가셨습니다. 그래야 성경에서 말씀하신 대로 세상 만민이 구원을 받는 일이 일어나게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기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 작정대로 주님은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고 그 아버지의 뜻에 순응한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십자가와 부활의 뼈대 위에 세워져있습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없습니다. 고통을 통과하지 않으면 영광은 없습니다. 슬픔이 지나야 기쁨의 의미를 알게 됩니다. 절망을 통과해야 희망을 얻게 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쉽게 살아가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영적으로 깊은 세계에 쉽게 도달하는 길은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힘들고 어려운 길은 건너뛰고 싶습니다. 도피하고 싶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유혹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주님은 손쉽고 필요한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안에서 고난을 선택하셨습니다. 우리는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시련과 고통을 이길 수 있는 인내의 힘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의 고난이 가볍게 지나가게 해달라고 기도할 것이 아니라, 이 고난을 통과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당장 쉬운 길은 도피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는 길은 과정이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영광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예수님처럼 이 땅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그 일을 이루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 지를 바로 알고, 또한 그 일을 감당하기 위해 나에게 온 고난의 쓴 잔이라 할지라도 감당 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찬송:459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