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5:17-27 전능자의 징계 찬송:272장

5:17 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 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징계를 업신여기지 말지니라

5:18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의 손으로 고치시나니

5:19 여섯 가지 환난에서 너를 구원하시며 일곱 가지 환난이라도 그 재앙이 네게 미치지 않게 하시며

5:20 기근 때에 죽음에서, 전쟁 때에 칼의 위협에서 너를 구원하실 터인즉

5:21 네가 혀의 채찍을 피하여 숨을 수가 있고 멸망이 올 때에도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

5:22 너는 멸망과 기근을 비웃으며 들짐승을 두려워하지 말라

5:23 들에 있는 돌이 너와 언약을 맺겠고 들짐승이 너와 화목하게 살 것이니라

5:24 네가 네 장막의 평안함을 알고 네 우리를 살펴도 잃은 것이 없을 것이며

5:25 네 자손이 많아지며 네 후손이 땅의 풀과 같이 될 줄을 네가 알 것이라

5:26 네가 장수하다가 무덤에 이르리니 마치 곡식단을 제 때에 들어올림 같으니라

5:27 볼지어다 우리가 연구한 바가 이와 같으니 너는 들어 보라 그러면 네가 알리라

오늘 내용은 엘리바스의 권면으로 죄를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엘리바스는 고난이 비록 죄의 결과이기는 하나 그것이 하나님의 의로운 징계임을 알고 회개하는 자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어 회복되는 축복을 받게 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엘리바스의 주장은 성경 전반에 면면히 흐르는 사상으로 그 자체로는 분명히 옳은 이야기 입니다. 그러나 엘리바스는 여전히 욥의 고난의 원인이 그의 특정한 죄에 있다는 인과응보론적인 논지를 전제로 하여 강변하는 잘못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17절에 보면, ‘하나님께 징계를 받은 자는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엘리바스의 이 말은 맞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내리기로 작정하신 자에게는 재앙도 내리지 않고 그 죄 가운데서 살도록 그대로 내버려두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리셨다는 것은 회개할 기회가 아직 남았다는 뜻이고, 회개하면 그 재앙을 거두고 다시 복을 내리신다는 뜻이니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자는 그래도 복이 있는 자라는 것은 결코 틀린 말은 아닙니다.

엘리바스는 만일 욥이 조용히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모든 재앙이 닥쳐와도 하나님께서 막아주실 것이고, 기근이나 전쟁에서도 죽지 않게 하실 것이며, 세상 모든 자들이 욥을 저주한다고 할지라도 그 저주가 임하지 않게 하시고, 약탈과 굶주림쯤은 웃어넘길 수 있을 정도의 여유를 갖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엘리바스는 욥이 이 재앙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그 모든 죄를 용서해주시고 복을 주시는데 너는 왜 그 은혜를 저버리고 회개도 거부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회개의 기회를 하라고 촉구하는 의미로 재앙을 주신 것이니 조용히 회개하면 모든 것이 다 풀리게 될 터인데, 욥은 왜 자기에게 이런 재앙을 주셨냐며 절규를 했으니 이런 행동은 하나님의 징계를 업신여기는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하나님의 징계를 업신여기지 말고, 조용히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 엘리바스의 감동적인 이 말에서 무엇이 문제일까요?

엘리바스는 하나님의 뜻을 자기 소유물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엘리바스는 욥이 아무리 간절하게 기도를 한다고 할지라도 하늘에 있는 그 누구도 들어주지 않을 것이라고 5:1에서 말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경건한 자의 기도는 들으시지만 욥이 받을 것은 오직 재앙뿐이라고 5장에서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다 들이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언제 갑자기 하나님의 뜻이 바뀐 것일까요? 조금 전에 욥이 어떤 기도를 해도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시리라 말했던 것은 누구의 뜻이며, 지금 기도하면 들으시리라고 한 것은 또 누구 뜻입니까? 엘리바스는 하나님의 말씀을 마치 자기 소유물처럼 이리저리 바꿔가며 욥을 마음대로 유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뜻이 곧 하나님의 뜻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엘리바스는 자기의 말이 틀림없이 맞는 말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이니 자기들이 순종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연구하여 낸 것이니 이것이 곧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바스 같은 유형의 사람들이 오늘날 너무나도 많습니다. 내 생각과 조금이라도 다르면 상대가 잘못된 것이라고 곧바로 상대를 정죄하는 자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혹시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보다 내 가치관이나 내가 생각하는 신앙생활의 형태를 가지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거나 잘못 되었다고 판단하지는 않은지 우리는 자신을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또한 엘리바스의 변론은 욥의 현재 상황을 안타까워하며 위로하기 보다는 방관자적 말투로 일관하고 있다는 점에서 욥의 고통을 해소시켜 줄 수도 없었습니다. 만일 엘리바스의 말이 사실이라면 욥은 멀지 않은 때에 건강이 회복되며, 모든 것이 회복되는 등의 결과가 나타나야 할 것이지만 현실적으로 욥의 입장에서 볼 때 그러한 축복을 기대한다는 것조차 지금의 상황은 기대 할 수 없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물론 욥은 엘리바스의 말대로 후에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고난을 인내한 자가 모두 세상에서 축복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의 고난을 인내하며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을 때 축복을 받는다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장차 종말의 때에 주어질 영광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엘리바스의 고난관은 지극히 불완전하고 편협한 것이었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는 교훈은?

본문은 엘리바스가 욥의 고난이 죄로 인해 발생한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에서 한 말이기는 하지만, 그 속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를 징계하신다는 요지는 분명한 사실이기도 합니다. 사실 사랑하는 자녀를 올바로 키우기 위해서는 때로 징계와 체벌이 필요하기도 하지 않습니까?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를 때로는 징계를 통해 연단시키시며 바른 길로 인도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랑의 징계에 대해 성도들이 어떻게 대해야 할지 교훈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는,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징계하실 때에 소홀히 지나치지 않고 자신을 깊이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후에는 겸손히 징계를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야 하겠습니다.

때로는 이 징계가 유익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내 영을 살리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지 않던 사람이 고난이 올 때 기도하게 되고, 그로인해 하나님을 깨닫고, 하나님을 경험하니 유익한 것입니다.

둘째는, 징계를 기쁨으로 받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자식을 징계하지 않을 아버지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징계하시는 것은 우리를 참 아들로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로 삼아 주신 성도에게는 징계를 내려서라도 바른 길로 가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징계하시는 뜻에 기쁘게 복종하여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의 징계는 우리 개개인에게 다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이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자신의 유익으로 삼을 수 있는 신앙인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한결 더 성숙되고 단련된 모습으로 하나님 앞으로 나올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찬송:38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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