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6:1-13 전능자의 화살이 내게 박히고 찬송:91장

6:1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6:2 나의 괴로움을 달아 보며 나의 파멸을 저울 위에 모두 놓을 수 있다면

6:3 바다의 모래보다도 무거울 것이라 그러므로 나의 말이 경솔하였구나

6:4 전능자의 화살이 내게 박히매 나의 영이 그 독을 마셨나니 하나님의 두려움이 나를 엄습하여 치는구나

6:5 들나귀가 풀이 있으면 어찌 울겠으며 소가 꼴이 있으면 어찌 울겠느냐

6:6 싱거운 것이 소금 없이 먹히겠느냐 닭의 알 흰자위가 맛이 있겠느냐

6:7 내 마음이 이런 것을 만지기도 싫어하나니 꺼리는 음식물 같이 여김이니라

6:8 나의 간구를 누가 들어 줄 것이며 나의 소원을 하나님이 허락하시랴

6:9 이는 곧 나를 멸하시기를 기뻐하사 하나님이 그의 손을 들어 나를 끊어 버리실 것이라

6:10 그러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위로를 받고 그칠 줄 모르는 고통 가운데서도 기뻐하는 것은 내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하지 아니하였음이라

6:11 내가 무슨 기력이 있기에 기다리겠느냐 내 마지막이 어떠하겠기에 그저 참겠느냐

6:12 나의 기력이 어찌 돌의 기력이겠느냐 나의 살이 어찌 놋쇠겠느냐

6:13 나의 도움이 내 속에 없지 아니하냐 나의 능력이 내게서 쫓겨나지 아니하였느냐

오늘 말씀은 엘리바스의 1차 변론에 대한 욥의 답변의 말씀입니다.

원인 모를 재앙으로 비탄에 잠겨 있던 욥은 그의 절친했던 친구들이 오자 그들의 위로를 기대하며 그의 비탄의 심정을 토로했습니다.

그러나 욥의 기대와는 달리 엘리바스는 오히려 욥의 고난의 원인이 그의 죄에 있는 듯이 냉정하게 말하는가 하면 다분히 훈계자의 태도로 그에 대한 동정과 위로의 말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감정이 격발한 욥은 본문을 통하여 자신의 고난의 원인이 자신의 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자신의 결백을 변호하고, 이어 다시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며 그 방편으로 죽음을 사모하고 있습니다.

욥이 처한 여러 정황을 고려할 때 그의 이러한 반응은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이것은 일면 욥의 신앙적 한계를 노출시킨 것이기도 합니다. 즉 욥은 비록 엘리바스의 주장과 같은 고난당할 만한 죄를 범하지는 않았지만, 인간의 부패하고 죄악 된 본성을 올 망각하고 자신의 의를 지나치게 주장하며 자신의 도덕적 삶을 지나치게 과신하는 과오를 범한 것입니다.

특히 이는 본서 전체가 가지는 특징적인 주제 전개를 알게 해주는데, 즉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이렇듯 자기 의를 변호하며 불평하던 욥이 점차 친구들과의 논쟁을 통해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와 이에 대한 온전한 순종과 구원에의 확신에 이르게 됨으로써 더 큰 신앙 성숙과 축복에 이르게 됨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에 욥은 본서 결론부에서 자기 의를 주장하며 불평하던 것에 대해 하나님의 책망을 듣고 인간의 한계성을 결국 통감하며 회개하게 됩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에서 생각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 앞에 겸손한 자는 비록 전적으로 옳은 말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 말속에 포함되어 있는 진리의 요소를 발견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욥이 보다 겸손했다면 엘리바스의 말이 비록 전부 올바르지는 않았다고 할지라도 그를 통해 자신 속에 내재된 인간으로서의 죄성을 돌아보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공의로운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의지하며 이해할 수 없는 고난 중에도 그에 온전히 순응하는 모습을 보였을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어리석은 자의 입술과 행동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뜻이 보여 질 수 있음을 깨닫는 영적 겸손함을 가져야 할 뿐만 아니라, 고난의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믿고 의지하며 따르는 영적 순전함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는 교훈은?

오늘 말씀 10절을 보면 욥은 고통 가운데서도 기뻐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욥이 고통 중에도 기뻐하는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요?

첫 번째, 두려움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기 때문입니다.

욥은 자신에게 닥친 재앙과 그로 인한 괴로움이 바다의 모래보다 더 무겁게 느껴진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욥은 이 고난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는 생각에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이 두려움은 결국 하나님께로 나아가도록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고난은 축복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요? 고난의 때에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 갈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죽을 싶을 정도로 힘든 일이 있습니까? 나는 위로받고 싶을 때 누구를 먼저 찾아갑니까? 하나님을 찾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고통 중에도 기뻐하는 이유 두 번째는, 고통 중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욥의 눈에는 파멸된 가정과 순식간에 사라진 모든 재산이 회복될 가능성이 없어 보이고, 자신의 몹쓸 질병과 극심한 고통도 전혀 치료될 것 같지 않습니다. 이제 아무런 기대도, 다시 일어설 힘조차 없는 욥은 고통을 견디고 살아내기에 너무 지쳐서 이제 죽을 날만 기다립니다. 그러나 욥은 이 모든 고난이 죄에 대한 벌이 아님을 믿습니다. 고통 중에도 받을 위로와 누릴 기쁨이 있다고 고백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죽고 싶을 정도로 힘든 상황이 올 때에도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찾고, 삶 속에서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 고난도 기쁨이 될 수 있는 수준 높은 신앙인들이 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찬송:38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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