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8:1-10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찬송:446장
8:1 수아 사람 빌닷이 대답하여 이르되
8:2 네가 어느 때까지 이런 말을 하겠으며 어느 때까지 네 입의 말이 거센 바람과 같겠는가
8:3 하나님이 어찌 정의를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
8:4 네 자녀들이 주께 죄를 지었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버려두셨나니
8:5 네가 만일 하나님을 찾으며 전능하신 이에게 간구하고
8:6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반드시 너를 돌보시고 네 의로운 처소를 평안하게 하실 것이라
8:7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8:8 청하건대 너는 옛 시대 사람에게 물으며 조상들이 터득한 일을 배울지어다
8:9 (우리는 어제부터 있었을 뿐이라 우리는 아는 것이 없으며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와 같으니라)
8:10 그들이 네게 가르쳐 이르지 아니하겠느냐 그 마음에서 나오는 말을 하지 아니하겠느냐
오늘 말씀은 욥의 친구 빌닷이 욥에게 권면하는 내용의 말씀입니다.
- 1- 7절은 빌닷이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빗대어 욥을 공격합니다.
빌닷은 욥의 절규를 듣고 마음이 몹시 상하였습니다. 그래서 빌닷은 처음부터 신경질적이고 충동적으로 반응합니다.
욥에게 분노를 느낀 빌닷이 엘리바스에 이어 욥에게 논쟁을 벌입니다. 엘리바스가 그랬던 것처럼 빌닷 역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빗대어 욥을 공격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틀림이 없다는 것입니다.
욥이 이런 재앙을 당한 것을 보면,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욥에게 내려진 것이 분명하고, 따라서 욥이나 욥의 자녀들이 치명적인 죄를 지은 것임에 틀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을 공격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논쟁을 벌이느냐고 욥에게 호통을 칩니다.
빌닷의 말대로 하나님께서는 공의로 심판하시는 분입니다. 빌닷의 말대로 의로운 자에게는 복을 주시고, 악한 자에게는 심판을 내리십니다.
그러나 빌닷은 단지 욥에게 재앙이 일어났다는 것 하나만으로 욥이 엄청난 죄를 지은 것으로 단정합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심판의 내용을 모두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빌닷은 자신의 이런 주장을 강조하기 위해 욥이 그의 자녀들을 성결하게 하기 위해 번제를 드린 것도 아무 쓸모없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욥의 번제가 참된 것이었다면 욥에게 이런 재앙이 내려질리 없다는 것입니다. 그 번제로 해결될 정도의 죄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빌닷이 자기의 생각을 가지고 지금 상황을 마음대로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모습을 보고 내 판단이 잘못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항상 하나님께 바른 지혜와 분별력을 주시기를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욥은 5절에 보면, 빌닷은 하나님께서 먼저 욥을 찾아주시기를 바라지 말고 욥이 먼저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 7절의 말씀과 같이 그의 지금의 현실은 참으로 보잘 것 없으나 그의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고 말합니다.
이 7절의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창대하리라”는 말씀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좋아하는 말씀 중의 하나입니다. 일단 뜻이 좋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빌닷이 ‘너는 아무리 빌고 빌어도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했던 조롱 섞인 말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누군가를 공격하는 도구로 사용하면 안 됩니다. 이것은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이 됩니다.
- 8-10절은 빌닷이 조상들의 지혜를 동원하여 욥을 공격합니다.
엘리바스는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신비로운 체험에 대한 말을 하였으나, 빌닷은 자신의 말이 옳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오랜 지혜 전통을 동원합니다. 빌닷 말한 조상들로부터 전해 오는 지혜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자는 항상 복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는 자는 항상 저주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욥이 지금 재앙을 당하고 있으면서도 자기는 죄를 범한 적이 없다고 말하니, 조상으로부터 전해오는 이런 인과응보의 원리를 욥이 거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삶의 과정에서의 복과 저주는 아주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 400년 가까이 노예로 살았던 것은 그들의 죄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10년간 쫓겨 다닌 것도 역시 죄 때문이 아닙니다. 사도 요한을 제외하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 다 아주 비참하게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순교는 죄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죽기까지 믿음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부자는 하나님의 복을 받은 증거입니까? 그렇디 않습니다. 예수님은 반대로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약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이런 세상에 나타난 것만을 보고 그 사람이 축복을 받았다든지, 아니면 저주를 받았다든지 하며 단정하는 것을 결코 옳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는 교훈은?
사람들은 흔히 남에 대한 이야기들을 하기 좋아합니다. 특히 다른 사람들을 칭찬하는 말 보다는 헐뜯고 비판하는 말들을 많이 하며 또 즐겨합니다. 그러나 이는 실로 남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에서는 결코 나올 수 없는 것으로서, 남을 하찮게 여기는 마음에서 나오는 악한 행위입니다.
더욱 이 불행을 당하고 있는 이웃에게 사랑과 위로를 베풀기는 커녕 냉정한 비판과 정죄를 가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더 악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보면 빌닷이 욥이 당하고 있는 그 고통을 위로하기는커녕 욥을 비난하는 것은 참으로 악한 모습입니다.
남의 불행을 판단하는 죄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실로 교만한 죄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할 수 있는 권세는 오직 의로운 재판장 되시는 하나님께만 있으므로 남의 불행을 판단하는 자는 스스로 그 하나님의 재판권을 범하여 교만한 죄를 범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모든 사람은 똑같이 연약하고 죄를 범할 수 있는 죄인임에도 자신의 죄와 연약함을 돌아보지 못하고 남을 판단하고 정지한다는 것은 실로 헛된 교만을 행하는 것이라 아니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의 불행을 판단하는 교만의 죄를 결코 범해서는 안 되며, 오직 남의 불행 앞에서 그 아픔을 함께 나누며 그들을 위로하고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그들의 불행을 긍휼히 여겨 달라고 기도하는 성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찬송:400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