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8:11-22 하나님 없는 자의 운명 찬송:197장

8:11 왕골이 진펄 아닌 데서 크게 자라겠으며 갈대가 물 없는 데서 크게 자라겠느냐

8:12 이런 것은 새 순이 돋아 아직 뜯을 때가 되기 전에 다른 풀보다 일찍이 마르느니라

8:13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자의 길은 다 이와 같고 저속한 자의 희망은 무너지리니

8:14 그가 믿는 것이 끊어지고 그가 의지하는 것이 거미줄 같은즉

8:15 그 집을 의지할지라도 집이 서지 못하고 굳게 붙잡아 주어도 집이 보존되지 못하리라

8:16 그는 햇빛을 받고 물이 올라 그 가지가 동산에 뻗으며

8:17 그 뿌리가 돌무더기에 서리어서 돌 가운데로 들어갔을지라도

8:18 그 곳에서 뽑히면 그 자리도 모르는 체하고 이르기를 내가 너를 보지 못하였다 하리니

8:19 그 길의 기쁨은 이와 같고 그 후에 다른 것이 흙에서 나리라

8:20 하나님은 순전한 사람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악한 자를 붙들어 주지 아니하시므로

8:21 웃음을 네 입에, 즐거운 소리를 네 입술에 채우시리니

8:22 너를 미워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라 악인의 장막은 없어지리라

계속해서 빌닷의 권면입니다.

빌닷은 욥을 하나님을 부인하는 불경건한 자로 단정하면서, 욥처럼 저속한 자들은 그 삶이 허망한 것밖에 거둘 것이 없다는 것을 다음 세 가지 비유로 말합니다.

  1. 11-19절은 빌닷의 세가지 비유입니다.

1) 11-13절 말씀으로 물 없는 곳에서 자라는 왕골과 갈대로 비유합니다.

왕골과 갈대는 물이 없으면 자랄 수가 없습니다. 마른 땅에서는 새순이 돋더라도 베기도 전에 곧 말라버립니다. 빌닷은 욥과 같이 하나님을 잊고 사는 자,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저속한 자는 물 없는 곳에 자란 왕골이나 갈대와 같이 곧 말라서 죽고 말 것이라고 말합니다.

왕골이나 갈대는 물이 잘 공급되면 다른 식물에 비해 키가 크고 울창하게 자랍니다. 그러나 물의 공급이 중단되면 그것이 전성기라 할지라도 다른 풀보다 먼저 시들어 버립니다. 이는 그 속이 빈 까닭으로, 이러한 사실은 그들의 번성은 환경이 좋을 때만 가능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번성은 그 환경이 조금만 변해도 언제든지 끝나 버릴 번성인 것이라는 것입니다.

빌닷의 말은 물 없는 곳에서 자란 왕골과 갈대가 어떻게 해서 새순이 돋았더라도 곧 말라버리는 것처럼, 본래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몰랐던 저속한 욥이 그 근본이 드러나서 말라버리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주장을 욥에게 적용시키는 것은 무리입니다. 왜냐하면 욥은 하나님만을 의지했고 하나님으로부터 순전하고 정직한 자로 인정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빌닷의 주장에 지나지 않은 것입니다.

2) 14-15절은 거미줄로 만든 집에 비유합니다.

빌닷은 계속해서 욥과 같이 불경한 자들은 혹시 집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마치 거미줄로 만든 집과 같아서 그 집에 기댈 수도 없고, 그가 집을 지키려고 애를 써도 곧 무너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거미줄로 만든 집은, 그의 집이 겉보기에는 아주 든든한 집처럼 보였으나 거미줄로 만든 집처럼 아주 쉽게 무너지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욥이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3) 16-19절은 뿌리째 뽑힌 식물에 비유합니다.

빌닷은 세 번째로 정원에서 햇빛과 물을 잘 공급받아 그 뿌리가 돌무더기에까지 뻗은 싱싱하게 잘 자란 식물에 비유합니다. 그러나 그런 식물도 뿌리까지 뽑히고 나면 그 정원에 그 식물이 있었는지를 기억하는 자가 아무도 없고, 그 식물이 있던 자리에는 다른 식물이 자란다고 말합니다.

이 비유 역시 욥의 집이 정원에 넓게 뿌리를 박은 잘 자란 식물처럼 크게 부유하였으나, 그 식물이 뿌리째 뽑힌 것처럼 욥의 집의 모든 것이 다 사라졌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욥이 한 때 부유한 자였으나 그 자녀와 재산을 한꺼번에 잃어버린 것을 빗대어 한 말입니다.

이렇게 빌닷은 욥에게 일어난 현상을 보고 욥을 하나님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아주 저속하고 불경건한 자로 규정합니다. 그의 말은 욥을 돕기 위한 말이 아니라, 욥을 더욱 절망 속으로 몰아넣는 잔인하기 짝이 없는 충고입니다.

여러분! 흔히 “내가 틀린 말 했나?”하면서 충고랍시고 던지는 말에 상대는 비수를 맞는 것처럼 그 마음에 큰 상처를 입을 수 있습니다. 내가 던진 말이 상대에게 고통을 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항상 조심해서 말을 해야 하겠습니다.

  1. 20-22절은, 하나님의 복을 적선하듯 던지는 빌닷의 교만입니다.

빌닷이 이렇게 실컷 욥을 조롱을 한 후에 하나님께서는 순전한 사람을 붙들어주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빌닷이 이미 욥을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아주 저속하기 짝이 없는 악한 자로 몰아붙였으니 빌닷의 이 말은 욥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빌닷은 마치 적선하듯 하나님의 복의 말씀을 욥에게 툭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속으로는 “물론, 너에게는 이런 말이 아무런 소용이 없겠지만~”하고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때로는 칼보다 사람의 말이 더 사람을 고통스럽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빈정거리며 툭 던짐으로 욥을 고통스럽게 하는 빌닷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을 공격하는 도구로 사용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함부로 다루는 빌닷의 교만은 참으로 두려운 죄가 아닐 수 없습니다.

빌닷의 교만은 말씀을 전하는 자들이 빠지기 쉬운 죄이기도 합니다. 우리들 중 누구도 하나님의 말씀을 내 소유물처럼 함부로 다룰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자는 없습니다. 목사나 장로나 그 누구도 두려움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여야 합니다. 누구를 공격하기 위해 말씀을 사용하지도 말고, 적선하듯 좋은 말 한 마디 툭 던지듯 말씀을 가볍게 여기지도 말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는 교훈은?

남의 불행을 판단하는 죄는 그 불행한 상황 가운데 담긴 하나님의 의로우신 뜻과 섭리를 거스르고 왜곡시키는 불의한 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사람의 불행 속에는 물론 그 사람의 잘못을 깨닫게 하여 돌이키게 하려는 징계의 뜻도 있지만, 그 사람을 연단시켜 더욱 성숙케 하고 더 큰 축복에 이르게 하려는 하나님의 깊고 의로우신 뜻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의 불행 앞에서 그 불행한 상황 자체만을 놓고 남을 정죄 하고 판단한다는 것은 그러한 하나님의 의로우신 뜻과 섭리를 가리우는 불의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는 분명 남을 비판하지 말 것을 명하시고 계시기에 남의 불행을 판단하는 일은 그러한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불의한 죄이며, 특히 불행을 당해 연약함중에 있는 자를 판단하는 일은 그를 더욱 곤고케 하여 절망 가운데로 실족케 하기 쉽기에 실로 불의한 죄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지극히 연약하고 불완전한 우리의 판단력으로 남의 불행을 판단한다는 것은 잘못된 오해와 착각으로 불의한 판단을 하기 쉽기에 그것은 진정 불의를 멀리해야 할 우리 성도들이 결코 범해서는 안 될 죄인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어 거룩하고 의로운 삶을 살아가야 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남을 비방하고 남의 불행에 대해 경솔히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남의 불행에 대해 지극히 불완전하고 불의한 판단을 내려 하나님의 의로우신 뜻을 거스르는 불의한 죄도 범치 말아야 하겠습니다.

남의 불행 앞에서 우리가 취할 자세는 겸손한 자세로 그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며, 하나님의 의로우신 섭리 가운데서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 뿐이라는 것을 잊지 말고 정죄와 판단이 아니라 사랑과 위로가 넘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찬송:39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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