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9:1-16 측량 할 수 없는 하나님 찬송:526장
9:1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9:2 진실로 내가 이 일이 그런 줄을 알거니와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
9:3 사람이 하나님께 변론하기를 좋아할지라도 천 마디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리라
9:4 그는 마음이 지혜로우시고 힘이 강하시니 그를 거슬러 스스로 완악하게 행하고도 형통할 자가 누구이랴
9:5 그가 진노하심으로 산을 무너뜨리시며 옮기실지라도 산이 깨닫지 못하며
9:6 그가 땅을 그 자리에서 움직이시니 그 기둥들이 흔들리도다
9:7 그가 해를 명령하여 뜨지 못하게 하시며 별들을 가두시도다
9:8 그가 홀로 하늘을 펴시며 바다 물결을 밟으시며
9:9 북두성과 삼성과 묘성과 남방의 밀실을 만드셨으며
9:10 측량할 수 없는 큰 일을, 셀 수 없는 기이한 일을 행하시느니라
9:11 그가 내 앞으로 지나시나 내가 보지 못하며 그가 내 앞에서 움직이시나 내가 깨닫지 못하느니라
9:12 하나님이 빼앗으시면 누가 막을 수 있으며 무엇을 하시나이까 하고 누가 물을 수 있으랴
9:13 하나님이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시나니 라합을 돕는 자들이 그 밑에 굴복하겠거든
9:14 하물며 내가 감히 대답하겠으며 그 앞에서 무슨 말을 택하랴
9:15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대답하지 못하겠고 나를 심판하실 그에게 간구할 뿐이며
9:16 가령 내가 그를 부르므로 그가 내게 대답하셨을지라도 내 음성을 들으셨다고는 내가 믿지 아니하리라
오늘 말씀은 빌닷의 말에 대한 욥의 답변입니다.
앞선 8장에서 전통적 인과응보의 원칙론에 입각해 욥을 정죄했던 빌닷의 논증에 대해 욥이 반론을 제기합니다. 여기에서 욥은 실로 위대하고 주권적인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욥의 수용적인 신앙과 함께 여전히 그러한 하나님의 섭리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불만을 토로하는 욥의 한계성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1-4절은 인간의 내재적인 범죄성향과 불의함을 지적하고, 5-10절에서는 우주를 창조하시고 자연계를 마음대로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지혜로우심과 전능하심에 대해 대조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욥은 인간의 나약함과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에 대한 깊이 있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신앙은 당연히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실제 생활에서의 태도로 나타나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후의 욥의 태도에는 하나님을 원망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이는 당시 욥이 당하던 고난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극심했음을 보여 주는 것임과 동시에 욥 역시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인과응보론의 논리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자신에게 닥친 고난을 부당한 것으로 여기고 있었음을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욥은 일단 하나님께서 선한 자에게 복을 주시고 악한 자에게 벌을 주신다고 말한 엘리바스와 빌닷의 인과응보의 교리를 인정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죄 없다고 말할 자가 누가 있겠느냐고 반문합니다. 이것은 욥이 죄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도 죄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욥이 지금 당하고 있는 이 엄청난 재앙을 당할 만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욥은 그럴 수만 있다면 하나님과 만나서 자기 죄가 무엇인지 하나님께 묻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설령 하나님과 논쟁할 수 있는 그 기가 막힌 일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천 마디 말씀 하실 때 단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연약한 사람이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말 한 마디라도 할 수 있겠느냐며 한탄합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온 우주의 그 넓은 곳에서 이 작은 욥 한 사람의 고통쯤 하나님께서 생각이나 하시겠느냐고 볼멘소리를 합니다. 땅을 움직여 그 자리에서 미시면 땅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들이 흔들리며, 해에게 명령하여 뜨지 못하게 하시고, 별도 가두기에 빛을 내지 못하게 하시며, 홀로 하늘을 펼치시며 바다 물결을 짓밟으시는 이, 측량할 수 없는 큰일을 하시며, 셀 수 없는 기이한 일을 행하시는 이, 그 놀랍고 크신 능력을 가지신 전능하신 하나님이 이 작은 한 사람의 고통을 생각이나 하시겠느냐는 것입니다.
만일 보통 사람들 같으면 이쯤 생각했다면 하나님을 떠날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자신의 고통을 돌아보시지 않는 하나님을 원하면서도 결코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그저 괴로우니 하나님께 투정하는 것일 뿐 정말로 그가 하나님을 미워하거나 불평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치 사랑하는 자에게 사랑의 투정을 부리듯 욥은 자신이 믿고 의지하는 하나님께 자신의 괴로움을 투정을 부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욥에게 배워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너무 답답하고 힘들면 하나님께 때로 절규도 하고 때로 원망도 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을 떠나거나 기도를 쉬는 일은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떠나거나 기도를 쉬는 순간 우리는 곧바로 마귀의 밥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욥이 끝까지 마귀의 밥이 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절망 중에도 끝까지 하나님을 붙들고 기도를 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는 교훈은?
서로 맞붙어서 싸워야 하는 격투기 운동에 있어서는 각각 체급별 구분이 있어 비슷한 체격 조건의 사람끼리 맞서게 됩니다. 어느 정도 상대가 될 만한 사람들끼리 맞서는 것이 합리적이고 마땅한 것입니다. 만약 상대도 안 되게 약한 어린 아이가 놀라운 힘과 실력을 갖춘 어른에게 맞서 싸우려 한다면 그것은 실로 가소롭고 어리석은 일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은 가끔 그토록 가소롭고 어리석은 맞대결을 하는 일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지극히 연약한 인간이, 심히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과 맞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불순종하며 하나님 앞에서 끝까지 자신의 뜻을 고집하며 하나님보다 높아지려고 하는 어리석은 맞대결을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하나님과 맞설 수 없으며 맞서서도 안 됩니다. 그분의 지혜는 실로 무궁하여 세상의 모든 지혜와 지식을 정복하고도 남음이 있으며,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세실 정도로 전지하신 분이고, 능치 못할 일이 없으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에 우리 인간이 아무리 강력한 무기와 고도의 과학과 기술을 가지고 있다 하여도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의 말씀 한 마디로도 이내 안개와 같이 사라질 수 있기에, 우리 인간이 스스로의 능력을 의지하고 내세우며 하나님과 맞서려고 하며 높아지려 하는 것은 실로 어리석고 가당치 않은 일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 뜻과 내 것을 고집하며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해 보기도 하고, 하나님의 의로우신 섭리와 역사를 거스르려 하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러한 과거의 어리석은 모습을 벗어버리고 오직 겸손한 자세로 돌이켜야 하겠습니다. 결코 맞설 수 없고 맞서서도 안 될 하나님 앞에서 오직 축복과 영생에 이를 순종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찬송:401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