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13:1-19 조언을 들을 때 303장

13:1 나의 눈이 이것을 다 보았고 나의 귀가 이것을 듣고 깨달았느니라

13:2 너희 아는 것을 나도 아노니 너희만 못하지 않으니라

13:3 참으로 나는 전능자에게 말씀하려 하며 하나님과 변론하려 하노라

13:4 너희는 거짓말을 지어내는 자요 다 쓸모 없는 의원이니라

13:5 너희가 참으로 잠잠하면 그것이 너희의 지혜일 것이니라

13:6 너희는 나의 변론을 들으며 내 입술의 변명을 들어 보라

13:7 너희가 하나님을 위하여 불의를 말하려느냐 그를 위하여 속임을 말하려느냐

13:8 너희가 하나님의 낯을 따르려느냐 그를 위하여 변론하려느냐

13:9 하나님이 너희를 감찰하시면 좋겠느냐 너희가 사람을 속임 같이 그를 속이려느냐

13:10 만일 너희가 몰래 낯을 따를진대 그가 반드시 책망하시리니

13:11 그의 존귀가 너희를 두렵게 하지 않겠으며 그의 두려움이 너희 위에 임하지 않겠느냐

13:12 너희의 격언은 재 같은 속담이요 너희가 방어하는 것은 토성이니라

13:13 너희는 잠잠하고 나를 버려두어 말하게 하라 무슨 일이 닥치든지 내가 당하리라

13:14 내가 어찌하여 내 살을 내 이로 물고 내 생명을 내 손에 두겠느냐

13:15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

13:16 경건하지 않은 자는 그 앞에 이르지 못하나니 이것이 나의 구원이 되리라

13:17 너희들은 내 말을 분명히 들으라 내가 너희 귀에 알려 줄 것이 있느니라

13:18 보라 내가 내 사정을 진술하였거니와 내가 정의롭다 함을 얻을 줄 아노라

13:19 나와 변론할 자가 누구이랴 그러면 내가 잠잠하고 기운이 끊어지리라

오늘 말씀도 소발의 1차 변론에 대한 욥의 계속되는 답변입니다.

오늘 본문은 1-3절은 욥이 세 친구의 자기중심적인 독선과 교만에 대해 지적하고, 4-12절은 세 친구들의 변론이 지극히 헛되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치 않은 잘못된 것이라는 내용과, 13-19절은 그러한 헛된 변론을 상대하기 보다는 이제 하나님을 의뢰함으로써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보겠다고 하는 욥의 의지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세 친구의 헛된 변론에 대한 욥의 비난을 통해 우리는 인간의 제한적인 경험으로 하나님의 무한하신 지혜를 제한하려는 인간적 교만은 결국 하나님이 절대 주권자임을 부인하는 불신앙의 발로임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비록 자신의 이성으로는 해답을 찾을 수 없는 문제를 함부로 판단하고 단정하기 보다는 이해와 해결을 하나님께 온전히 의뢰하는 절대 신앙을 소유해야 합니다.

12절에 보면, 욥은 이 세 친구들의 권면을 한마디로 “너희의 격언은 재 같은 속담이이요 너희가 방어하는 것은 토성이다”라고 말합니다.

욥은 그의 친구들이 욥에게 한 것과 같이 자기들의 지식이나 자랑하고 자신의 우월감에서 교만한 마음으로 상대를 한 단계 아래로 보고 하대하며 말하는 충고를 ‘재의 속담’, 혹은 ‘진흙으로 된 토성과 같은 교훈’이라고 말합니다.

말로는 충고나 덕담을 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실상은 멸시하고 조롱하는 욥의 친구들과 같은 말의 태도는 재를 가지고 건축을 하겠다는 것처럼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교훈이라는 것입니다.

재를 가지고 무슨 건축을 하겠습니까? 진흙으로 된 토성이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이런 조롱과 멸시가 담긴 교훈은 이렇게 쓸모없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욥이 말한 것처럼 오히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하는 자의 속마음을 들추어내셔서 그들을 멸망의 자리로 인도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자와 대화를 하든 간에 우리는 상대를 하대하면서 조롱하거나 멸시하는 태도로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13절부터 보면 욥은 하나님만 의뢰 하겠다고 말합니다.

욥은 그의 친구들이 욥을 저속한 죄질 흉악범 취급을 하니 이제 오직 하나님께만 의뢰하겠다고 말합니다. 14절에 보면, “내 살을 내 이로 물고 내 생명을 내 손에 두겠느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은 어떠한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무죄함을 변론하려는 욥의 결심을 나타낸 것입니다. 즉 이 말 속에는 하나님 앞에서 변론할 때 혹시 자신의 무례함으로 인하여 당하게 될지도 모르는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겠으니, 친구들은 더 이상 쓸데없는 말로 자신의 일에 간섭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내 살을 내 이로 물고”라는 말은 고통을 참거나 끝까지 침묵하기 위해 자기 살을 깨무는 것을 나타내는 격언적 표현입니다. 죽음의 두려움을 아랑곳하지 않겠다는 죽을 각오가 되어 있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는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께 맡긴 채로 하나님을 만나겠다는 것입니다. 마치 칼을 목에 닿아 있는 아주 절박한 상태에 빠지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님께서 나의 죄를 물어 나를 그렇게 참혹하게 죽이시는 일이 일어날지라도, 자신의 처지를 하나님께 아뢰겠다는 것입니다.

15절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만 있다면 목숨이라도 걸겠다는 욥의 각오를 볼 수 있습니다. 일촉즉발의 위험천만한 상태가 되더라도 하나님께 묻겠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차피 자신은 하나님의 손에 죽을 몸이니, 그렇게 하나님께서 욥을 죄인이라고 선언하시고 욥을 죽이신다고 할지라도 욥은 오직 하나님만을 의뢰하리라고 말합니다.

욥은 그렇게 절박한 심정으로 하나님께 자신의 처지를 아뢰는 것만이 자신이 구원을 받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욥은 아직도 하나님께서 왜 자신에게 이런 재앙을 내리셨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지만, 그래도 자신의 목숨을 맡길 곳은 오직 하나님뿐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렇게 절박한 상태로 하나님께 자신의 처지를 아뢰면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욥을 죄 없는 의로운 자라고 말씀해주실 것이라고 욥은 확신하고 있습니다.

욥의 이 고백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복음의 말씀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욥이 말한 대로 절박한 심정으로 주께 나를 의뢰하면 주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죄 없는 자로,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으로 인정하시리라는 것이 예수님의 복음의 말씀입니다. 욥은 이렇게 자신의 처지를 주께 아뢰겠다고 고백하는 중에 자기도 모르게 예수님의 말씀을 예언한 자가 되었습니다.

오직 주님을 의지하는 길만이 우리의 살 길이라 외친 욥의 고백처럼 우리도 어떤 일이 있을 때 사람에게 위로받고 사람을 의지하기 보다는 내가 하나님께 나가는 것입니다. 사람의 위로는 한계가 있고, 더 나아가 상처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욥처럼 내가 죽을 지라도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께 아뢸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깨달은 교훈은?

욥은 세상과 사람을 의지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우리가 고난 중에 더욱 힘들고 견디기 어렵게 되는 요인 중 하나는 우리가 의지하고 믿었던 세상 것들과 사람들에게서 기대했던 도움을 받지 못하고 실망과 좌절에 빠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에서 어떤 도움과 해결을 기대하고 의지하던 것만큼 깊은 실망감에 빠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의 때에 세상과 사람들을 의지하기보다 참된 의지의 대상이 되시는 능력의 하나님만을 모시고 스스로 담대히 고난에 맞서겠다는 적극적인 자세를 갖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고난은 괴롭고 힘든 것이기는 하나, 우리 성도들에게는 오히려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다가가고 믿음을 성숙시키며 더 큰 축복과 승리를 가져오는 복된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이에 우리 성도들은 고난을 당해 세상 사람들과 같이 슬픔 속에서 위축되고 절망만 해서는 안 됩니다. 실망만 줄 뿐인 세상과 사람에 대한 헛된 기대를 버리고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믿고 의지하며 순종함으로써 결국 고난을 극복하고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찬송:42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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