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16:1-10 내 아픔이 줄어들지 않으리 찬송:369장
16:1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16:2 이런 말은 내가 많이 들었나니 너희는 다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이로구나
16:3 헛된 말이 어찌 끝이 있으랴 네가 무엇에 자극을 받아 이같이 대답하는가
16:4 나도 너희처럼 말할 수 있나니 가령 너희 마음이 내 마음 자리에 있다 하자 나도 그럴 듯한 말로 너희를 치며 너희를 향하여 머리를 흔들 수 있느니라
16:5 그래도 입으로 너희를 강하게 하며 입술의 위로로 너희의 근심을 풀었으리라
16:6 내가 말하여도 내 근심이 풀리지 아니하고 잠잠하여도 내 아픔이 줄어들지 않으리라
16:7 이제 주께서 나를 피로하게 하시고 나의 온 집안을 패망하게 하셨나이다
16:8 주께서 나를 시들게 하셨으니 이는 나를 향하여 증거를 삼으심이라 나의 파리한 모습이 일어나서 대면하여 내 앞에서 증언하리이다
16:9 그는 진노하사 나를 찢고 적대시 하시며 나를 향하여 이를 갈고 원수가 되어 날카로운 눈초리로 나를 보시고
16:10 무리들은 나를 향하여 입을 크게 벌리며 나를 모욕하여 뺨을 치며 함께 모여 나를 대적하는구나
오늘 말씀은 엘리바스의 2차 변론에 대한 욥의 답변으로 17장까지 계속됩니다.
- 1-5절은 욥의 친구들에 대한 욥의 평가입니다.
욥은 계속되는 친구들의 차갑고 원칙론적인 변론으로 인해 점차 기운을 잃으며 절망적인 체념 상태로 빠져 들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친구들의 변론에 대한 원망 섞인 비난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욥은 친구들의 변론이 위로를 주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을 번뇌케 함을 지적함으로써 인간과의 논쟁이 무익함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욥의 답변을 통해 볼 때 실로 인간으로서는 인간 현존의 모든 문제를 바로 이해하거나 해결할 수 없으며, 이에 그 문제들로 고통받는 자들을 온전히 위로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본질적으로 이기적인 존재인 인간은 자기 위주의 말을 남발함으로써 타인을 번뇌케 하는 경우가 많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삶의 양식을 변화 받은 성도는 일상의 말과 생활에 있어 진지함을 가지며 하나님의 지혜에 의존함으로써 이웃에게 덕과 선한 영향력을 끼치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 6-10절은 욥의 답변으로 고난에 처하게 하신 하나님께 대한 욥의 한탄입니다.
앞선 단락인 1-5절에서 엘리바스를 비롯한 친구들의 변론이 그 내용이나 결과에 있어 바르지 못하였음을 지적했던 욥은 이제 그 대상을 하나님으로 바꾸어 자신의 심경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당시 욥으로서는 자신을 정죄하는 친구들보다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줄 것으로 신뢰했던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에 대해 더 절망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침묵은 자신에 대한 관심의 상실이며 친구들의 정죄에 대한 인정으로 보여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욥의 이러한 항변은 결코 정당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항변은 하나님의 무한하시고 의로우신 섭리에 대한 인정이 결여된 데서 나온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실로 욥은 절망하며 하나님 앞에서 한탄할 것이 아니라, 고난 가운데 내포된 하나님의 의로우신 섭리를 끝까지 신뢰하고 인정하는 태도를 취했어야 했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진정 하나님을 창조주며 주권자요, 구원자로 인정하는 자가 마땅히 도달해야 하는 높은 신앙의 경지인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욥과 같이 어떤 고난에 처한다 할지라도 하나님 원망하기 보다는, 그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고 신앙으로 굳게 서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는 교훈은?
욥의 세 친구는 고난에 처한 욥을 위로하고자 찾아왔다고 했지만, 정작 위로받을 대상인 욥에게는 그들의 말이 위로가 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욥은 그들을 2절에서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욥의 친구들의 방문은 오히려 아니 간만 못한 방문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위로자가 아니라 참된 위로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참된 위로를 줄 수 있는 사람은 어떠한 사람일까요 ?
첫째로, 참된 위로자는 상대방을 먼저 깊이 이해하고 그 아픔을 공감하는 자여야 합니다. 상대방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내 입장에서 내 생각대로만 주는 위로는 오히려 고통이 될 뿐입니다. 예수께서는 인간의 몸을 입고 육신의 고통을 직접 체험하신 분이기에 우리에게 참된 위로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참된 위로를 주고자 한다면 상대의 입장에 서서 그의 문제를 먼저 이해하고자 애써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용기를 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정죄하고 판단하여 그를 낙심 시키는 자가 아니라 용기를 주는 자기 되어야 하겠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의 고난 원인에 대해 자기들의 주장을 내세우느라 위로를 주기는커녕 그를 더 괴롭게만 했습니다. 이처럼 저도 실망에 빠져 있을 때 누가 위로를 한다고 하는데 그게 위로가 되기는커녕 너 힘들게 하는 경우들을 경험해 보았습니다.
이처럼 위축되고 곤고한 중에 처한 자에게는 비난보다는 용기를 줄 수 있는 위로가 필요합니다. 그러기에 참된 위로자는 용기를 주어 고난 속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돕는 자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기도로 위로하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어려운 일을 당한 사람을 위로하고자 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은 잠시의 위로일 뿐일 것입니다. 우리는 어려움 당한 자를 위하여 믿음으로 기도할 때 우리는 참 위로를 주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욥의 친구와 같이 도리어 상처를 주는 자가 되지 말고, 하나님의 위로하심을 본받아서 상대를 깊이 이해하고, 위로받을 자에게 용기를 주며, 기도로 위로하는 참된 위로자가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찬송:370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