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34:1-9 욥을 고소한 엘리후 찬송:325장
34:1 엘리후가 말하여 이르되
34:2 지혜 있는 자들아 내 말을 들으며 지식 있는 자들아 내게 귀를 기울이라
34:3 입이 음식물의 맛을 분별함 같이 귀가 말을 분별하나니
34:4 우리가 정의를 가려내고 무엇이 선한가 우리끼리 알아보자
34:5 욥이 말하기를 내가 의로우나 하나님이 내 의를 부인하셨고
34:6 내가 정당함에도 거짓말쟁이라 하였고 나는 허물이 없으나 화살로 상처를 입었노라 하니
34:7 어떤 사람이 욥과 같으랴 욥이 비방하기를 물마시듯 하며
34:8 악한 일을 하는 자들과 한패가 되어 악인과 함께 다니면서
34:9 이르기를 사람이 하나님을 기뻐하나 무익하다 하는구나
오늘 말씀은 엘리후의 2차 변론으로 욥에 대한 고소의 내용입니다.
앞 장에 나오는 1차 변론에서 엘리후는 욥이 자신의 무죄함을 주장하며 자신의 고난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의 응답 없음을 불평한 것은, 하나님의 의로운 섭리를 바로 알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측면에서 의를 이루시고자 항상 교훈하시고 징계로 연단하시는 하나님의 의로우신 섭리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즉 엘리후는 욥의 신앙적 무지함을 깨우치는 동시에 욥으로 하여금 간접적으로 그가 지금 고난을 통해 연단받는 것임을 깨닫고 회개함으로써 하나님의 회복의 은혜와 축복을 얻으라고 권고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본장에서 엘리후는, 한걸음 더 나아가 마치 자신이 고소자가 되어 재판을 진행하듯이 욥이 하나님을 불의한 분으로 여겨 대적했다고 고소하며, 욥이 마치 하나님의 공의를 부인하는 불신앙의 죄를 범한 것처럼 정죄합니다.
특히 본문에서 엘리후는 변론의 대상을 욥이 아니라 세상의 총명한 자들로 바꾸어 이들에게 판결을 요구하는 식으로 논리를 전개해 나가는데(2-4절), 이는 그의 변론의 정당함을 객관적으로 인정받으려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공의를 부인하는 듯이 보이는 욥의 발언을 제시하며 세상 지혜자들에게 욥을 고소하는 서론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즉 1-4절은 엘리후가 지혜자들에게 욥에 대해 판단해 줄 것을 요청하는 부분이며. 5-9절은 하나님의 공의를 부인하고 대적하는 듯한 욥의 발언을 들어 그의 죄목을 열거하며 마치 재판정에서 고소하는 듯한 태도를 취합니다.
그런데 사실 여기에서 엘리후는 욥의 변론중 하나님의 지혜나 거룩함, 공의로우심에 대해 언급한 말은 모두 생략하고 욥이 불평하고 한탄한 부분만 부각시켜 욥을 정죄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즉 그는 욥이 자신의 의를 주장하며, 그 의를 돌아보시지 않고 오히려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의 상황에 처하게 하신 하나님께 항의 했다고 하며, 욥이 마치 하나님을 불의한 분으로 대적했던 것처럼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욥은 절대 공의로우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소망을 저버린 적이 없으며, 단지 자신을 무고하게 정죄하는 자들을 향해 자신의 의로움을 항변했을 뿐이고 이해할 수 없고 견디기 힘든 고난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의로우신 섭리에 대해 알 수 없는 스스로의 신앙적 한계와 무지로 인해 탄식하고 비통해 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엘리후 역시, 앞의 세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자기중심적인 편견에 휩싸여 욥을 무고히 정죄하는데 급급해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로써 엘리후 또한 극심한 고난에 처해 있는 욥에게 진정한 이해와 위로를 주지 못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엘리후는 앞선 세 친구들의 주장과 마찬가지로 욥을 정죄하되, 오히려 한 걸음 더 나아가 재판의 형식을 취함으로 욥에 대한 정죄를 객관화시키려고 시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지혜를 부여받은 자라 할지라도 그 마음에 형제에 대한 진실한 사랑이 결여되면 형제를 바른 길로 이끌기보다는 그 마음에 상처를 입히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엘리후는 세 친구들과는 달리 고난을 하나님의 깊은 섭리 속에서 파악하며 연단의 기회일 수 있다는 통찰력있는 지혜를 가졌지만, 엘리후 역시 욥의 현재적인 상황에 대해 깊은 이해와 사랑없이 무죄함을 호소하는 욥의 모습만을 놓고 신랄하게 정죄하는 일에만 치중함으로 욥에게 위로가 되기는커녕 더 큰 고통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인간이 아무리 지혜롭다 할지라도 스스로 인간의 문제를 완전히 이해하고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오직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적 섭리와 역사하심을 통해서만 그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는 교훈은?
우리는 오늘 본문의 엘리후의 모습을 보면서, 이웃을 대함에 있어 이렇듯 편견과 아집에 빠져 경솔하게 판단하고 정죄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도록 심히 경계해야 할 것에 대해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오직 사람을 온전히 판단하고 정죄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 분 뿐이시므로, 지극히 부족하고 어리석은 같은 인간으로서의 우리가 남을 쉽게 판단하고 서슴없이 정죄함은 실로 하나님께 대한 크나 큰 월권행위요 교만함이며, 이로 인해 이웃에게 더 큰 상처를 입히고 실족케 할 수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을 가지고 사람들을 대하고 권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모든 것을 결국 본문의 엘리후와 같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우리 모두 사랑의 마음으로 형제들을 대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찬송:220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