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34:21-37 어떻게 공의를 펼치시는가 찬송:543장

34:21 그는 사람의 길을 주목하시며 사람의 모든 걸음을 감찰하시나니

34:22 행악자는 숨을 만한 흑암이나 사망의 그늘이 없느니라

34:23 하나님은 사람을 심판하시기에 오래 생각하실 것이 없으시니

34:24 세력 있는 자를 조사할 것 없이 꺾으시고 다른 사람을 세워 그를 대신하게 하시느니라

34:25 그러므로 그는 그들의 행위를 아시고 그들을 밤 사이에 뒤집어엎어 흩으시는도다

34:26 그들을 악한 자로 여겨 사람의 눈 앞에서 치심은

34:27 그들이 그를 떠나고 그의 모든 길을 깨달아 알지 못함이라

34:28 그들이 이와 같이 하여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이 그에게 상달하게 하며 빈궁한 사람의 부르짖음이 그에게 들리게 하느니라

34:29 주께서 침묵하신다고 누가 그를 정죄하며 그가 얼굴을 가리신다면 누가 그를 뵈올 수 있으랴 그는 민족에게나 인류에게나 동일하시니

34:30 이는 경건하지 못한 자가 권세를 잡아 백성을 옭아매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34:31 그대가 하나님께 아뢰기를 내가 죄를 지었사오니 다시는 범죄하지 아니하겠나이다

34:32 내가 깨닫지 못하는 것을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악을 행하였으나 다시는 아니하겠나이다 하였는가

34:33 하나님께서 그대가 거절한다고 하여 그대의 뜻대로 속전을 치르시겠느냐 그러면 그대가 스스로 택할 것이요 내가 할 것이 아니니 그대는 아는 대로 말하라

34:34 슬기로운 자와 내 말을 듣는 지혜 있는 사람은 반드시 내게 말하기를

34:35 욥이 무식하게 말하니 그의 말이 지혜롭지 못하도다 하리라

34:36 나는 욥이 끝까지 시험 받기를 원하노니 이는 그 대답이 악인과 같음이라

34:37 그가 그의 죄에 반역을 더하며 우리와 어울려 손뼉을 치며 하나님을 거역하는 말을 많이 하는구나

엘리후는 계속해서 공의로우신 하나님에 대해서 말합니다.

  1. 21-30절은 공의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에 대해 증거합니다.

엘리후는 악인이 하나님의 눈을 피하여 숨을 곳은 그 어디에도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심판하기 위해서 오래 조사하거나 오래 생각하실 필요가 없으며, 왕과 같이 세력 있는 자를 바꾸실 때에도 밤사이에 그들을 뒤집어엎어 멸망을 당하게 하실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모든 것을 낱낱이 아시는 하나님은 그 어떠한 은밀한 죄도 결코 그냥 넘어가지 않으시고 반드시 심판하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이 사랑이 많으시다보니 하나님이 이렇게 두려우신 분이심을 잊고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니 하나님께서 결국 세상 만민을 심판하시리라는 것도 잊고 살아갑니다.

28절부터 보면, 엘리후는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들의 울부짖는 기도를 들으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응답하지 않으시고 침묵하신다고 하더라도 세상의 그 누가 감히 하나님을 향하여 비난할 수 있느냐며 욥을 비난합니다. 이는 욥이 자신의 기도를 하나님이 듣지 않으신다는 원망에 대해서 비판하는 엘리후의 말인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후는 고통 속에서의 절규와 하나님을 향한 비난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욥은 하나님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고통 속에서 그 고통이 너무 힘들어 절규하는 것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엘리후는 욥의 절규를 하나님을 향한 비난으로 몰아가다가 아예 욥을 경건하지 못한 자로 규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1. 31-37절은 엘리후의 2차 변론의 종결로 욥에 대한 정죄와 저주입니다.

앞 단락에서 엘리후는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주권적인 공의에 대해 증거하며 그러한 하나님의 공의실현에 대해 아무도 항변할 수 없음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리고 이어 본 단락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이 고난에 처해 자신의 무죄함을 주장하며 불평과 원망을 한 것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절대적 주권에 대한 반항이라고 보고 그러한 욥을 악하다고 정죄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여기에서 엘리후는 욥이 고난 중에서 취해야 할 마땅한 자세란 죄로 인해 주어진 징계로서의 고난을 인정하고 자신의 죄를 겸허히 회개함으로써 그 고난 속에 담긴 하나님의 의로우신 뜻에 순종하는 것이라고 보고, 그렇게 하지 않고 자신의 무죄함만을 주장하며 고난에 대해 불평하는 욥은 실로 하나님의 의로우신 주권을 거역하고 죄에서 돌이키지 않는 악을 행하는 자라고 몰아붙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결국 엘리후는 욥이 회개하지 않는 한 계속 고난 받기를 원한다고 저주하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엘리후가 보기에 욥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마땅한 죄인일 뿐만 아니라 그러한 징계에도 불구하고 돌이킴 없이 더욱 커다란 패역의 죄를 범하고 있는 강하한 자였던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엘리후의 변론 중 고난 중에 먼저 자신을 돌아보고 겸손히 하나님의 뜻과 교훈하심에 순종해야 한다는 주장은 실로 옳은 것이며, 오늘날 우리 성도들 역시 반드시 기억해야 할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후는 여기에서 욥의 사정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참된 위로를 주지 못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의 주장이 욥에 대한 오해와 편견에서 비롯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앞에서도 계속 언급했듯이, 욥은 결코 하나님 앞에서 불신앙과 배역의 죄를 범한 적이 없으며, 욥이 자신의 무죄함을 주장하며 불평한 것도 하나님의 공의를 부인한 것이 아니라 단지 극심한 고난 속에서 자신의 처지를 호소하고 하나님의 공의를 간절히 소망하는 것이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이러한 엘리후의 오해와 편견이 가득 찬 변론과 저주는 결국 극심한 고난 가운데서 고통받고 있는 욥에게 더 큰 혼란과 비애감만을 가중시켰을 것임이 분명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는 교훈은?

우리는 엘리후의 행태를 보면서 어려운 고난에 처한 자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교훈을 받을 수 있습니다. 실로 어려움에 처한 자들을 위로함에 있어 우리 모든 성도들은 결코 자기중심적인 편견에 휩싸여 그들을 판단하고 정죄하기 보다는, 먼저 그들에 대한 진실 된 이해와 사랑을 가져야 하며 그들이 그 상황을 인내하고 극복함으로써 신앙적 승리를 이루도록 말씀을 근거로 권면하고 격려하며 소망을 주어야 함이 마땅하다 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모두 고난 받은 자들에게 옳은 소리를 하며, 죄를 회개하라고 다그치기 보다는 격려하며 위로하며 소망을 주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찬송:45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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