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2:1-9 아기 예수의 탄생 80장

2:1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2:2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2:3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2:4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2:5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2:6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2:7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2:8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2:9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인류의 역사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한 인류의 구속사임을 믿습니다. 창3:15절에서 여인의 후손으로 밝혀진 메시야의 언약이 있은 이래, 인간의 역사는 이 메시야 탄생과 메시야로 인한 인류의 구원의 역사로 계속되어온 사실에 대하여 인류의 역사와 성경은 일치되고 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자기들이 살고 있는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 가게 된 일이라든가, 그 베들레헴에서 아기 예수를 낳은 일 등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이미 미가 선지를 통해 예언한대로 성취된 일입니다. 미5:2에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이 미가의 예언이 응한 것은, 바로 로마 황제인 가이사 아구스도의 호적령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로마 황제인 아구스도의 등장도, 역사상 가장 잔인한 대 폭군 헤롯 왕의 등장도, 그리스도 탄생의 예언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 아구스도는 그 당시 로마제국의 황제입니다. 이 사람의 본명은 ‘가이우스 옥타비우수’로 주전27년부터 주후14년경까지 로마황제 직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가 자신의 통치기간 중에 인구 조사령을 내림으로 부지중에 미가서 5:2절에 기록된 메시야 탄생의 하나님의 예언을 성취시키는 일에 쓰임 받은 인물이 된 것입니다.

호적하러 올라온 마리아와 요셉의 경우를 보겠습니다. 예수님의 부모가 되는 요셉과 마리아는 나사렛 땅에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황제의 명에 따라 요셉의 본적인 베들레헴에 간 것입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베들레헴에 갔을 때, 이미 잉태된 마리아의 해산할 날이 찼다고 했습니다. 이 베들레헴은 다윗의 옛 도성으로 큰 도읍은 아닙니다. 그곳을 지나가는 나그네를 머물게 하기 위한 여관이 몇 있었지만 호적 하러온 사람들을 수용할만한 수효는 되지 못했습니다. 요셉은 아마 어느 여관 주인에게 간곡히 부탁하여 그 집 마구간 한편 구석을 잠자리로 마련했을 것입니다. 거기서 예수님을 해산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오늘 본문 7절에 강보에 싸서 구유에 뉘었다고 말씀 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철두철미한 낮아지심을 알 수 있습니다.

이때, 양떼를 치는 목자들이 들 밖에서 자기 양떼를 지키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밤중에 이들에게 주의 천사가 갑자기 나타난 것입니다. 이 같은 놀라운 광경을 바라보게 된 목동들은 심히 두려워했다고 말씀 합니다.

이러한 본문을 통해 본서 저자인 누가는 두 가지 사실을 강조하여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첫째로, 누가는 이방인 독자들이 그리스도의 탄생 사건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당시 아구스도가 인구 조사를 행한 역사적 사건과 그리스도의 탄생 사건을 연관시켜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성과 실재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런 아구스도의 인구 조사는, 하나님의 섭리로 볼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메시야가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이라는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서 당시의 통치자인 아구스도의 마음을 움직여 호적령을 내리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모든 역사가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속에서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고 하겠습니다.

둘째로 누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배경과 작은 성읍 베들레헴, 더구나 말구유에서 태어난 사실을 강조하여 하나님이시지만 비천한 인간의 육신을 입으시고 인자로 오신 메시야의 모습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는 죄로 인해 절망적이고 비천한 처지에 놓인 인간의 연약함과 고난을 체휼하셨으므로 우리의 사정을 너무도 잘 아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잘 아시는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낙심하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는 교훈은?

오늘 말씀에 보니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구유에 뉘이셨다고 말씀합니다. 그 이유에 대해 본문은 여관에 있을 곳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씀 합니다. 사람이 머무는 장소, 즉 여관에 예수님이 머물 장소가 없어서 동물을 위한 자리에서 태어 났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심령에는 과연 우리에게 예수님을 모실만한 방이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우리 삶에 역사하시도록 들어오실 방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니면 수많은 계획으로 우리 인생의 방이 가득차서 주님이 들어오실 방이 없지는 않습니까?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질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능력이 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우리 안에 머무르실 공간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영혼에 예수님이 왜 계시지 않은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 안에 너무나 많은 것들이 이미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들어가실 공간이 없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영혼의 공간을 비워야 합니다. 내 안에 가득 차 있는 잡다한 세상적인 것들을 비워내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영혼에 예수님이 거하실 공간을 마련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내 안의 주인으로 모심으로 이제 예수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찬송:33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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