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7:24-35 세례요한에 대한 증거와 복음에 반응하지 않는 자들 265장

7:24 요한이 보낸 자가 떠난 후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7:25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보라 화려한 옷을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

7:26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선지자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훌륭한 자니라

7:27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준비하리라 한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라

7:2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하시니

7:29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침례를 받은지라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 하되

7:30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은 그의 침례를 받지 아니함으로 그들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

7:31 또 이르시되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까 무엇과 같은가

7:32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7:33 침례 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매 너희 말이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7:34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7:35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오늘 말씀은 세례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증거의 말씀과 복음에 반응하지 않는 자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1. 24-30절은 세례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증거의 말씀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을 떠난 후에 예수님께서는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을 하셨습니다. 한마디로 그가 받은 사명과 그의 인간적인 위대성에 대해 칭찬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요한의 외침을 듣고 세례를 받으려고 요한에게 갔었으며 예수님은 지금 바로 그들에게 그들이 지난날에 요단 들에 나갔던 일을 회상시키면서 “너희는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고 하시며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보러 갔느냐’고 하십니다. 광야에는 갈대가 많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갈대라고 하신 표현은 한편 이스라엘의 지조 없는 지도자들, 세파에 흔들리는 변절된 제사장, 바리새인들, 서기관들을 비유적으로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해답을 예수님이 스스로 말씀하십니다. “보라 화려한 못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고 말씀하신 후 “선지자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 이처럼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 대해서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라고 극찬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리들에게 세례요한을 소개하면서 그의 위대성에 대해 두 가지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가리켜 선지자보다 나은 자라고 칭찬하셨습니다. 선지자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사명자들을 말하는데 선지자들의 종국적인 증거는 메시야에 대한 것입니다. 모든 선지자들의 증거는 초림의 메시야와 재림의 메시야에 대한 예언에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이들 많은 선지자들의 경우와 다른 위치에서 메시야를 증거했는데 그것은 자기 눈으로 메시야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 메시야를 증거하는 사명자로 선택받은 선지자였습니다.

예수님은 또 세례요한에 대해 여자가 나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이가 없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세례요한이야말로 인류 중에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가장 위대하고 복된 사명을 받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처럼 그에 대해 칭찬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천국 백성 된 자의 놀라운 특권에 대하여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왜 지극하 작은 자들이 요한보다 크냐? 이들은 여자가 난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피로 값 주고 사신 값진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하나님의 후사들이기 때문입니다.

  1. 31-35절은 복음에 반응하지 않는 영적으로 무감각한 세대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영적으로 무감각한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한 비유를 들어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어린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동심으로 소꿉장난 놀이를 하고 있는 모습에서 그 소재를 삼으셨습니다. 이 아이들은 그 나름대로의 열심을 다 해 한편쪽에서 피를 불어댔습니다. 그러나 상대편이 그 피리소리에 장단을 맞추어 춤추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불만이 되어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아니한다”고 항의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상대편에서는 “우리가 애곡해도 너희는 왜 울지 않느냐”고 항의하는 모습으로 재미있어야 할 이들의 놀이가 결국 싸움과 파국을 맞는 사실을 비유로 인용하여 경종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피리는 복음을 의미합니다. 비유에서 말씀하신 피리란 좋은 소식, 기쁜 소식을 의미하는 것으로 복음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이 피리를 부신 분입니다. 예수님이 피리를 부실 때 이를 듣는 모든 사람들은 이 피리소리에 기뻐하며 함께 춤추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은 기뻐할 줄을 몰랐습니다. 춤추기는 고사하고 피리를 부는 주님을 향하여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며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비방했습니다.

복음은 모든 사람들에게 춤을 추게 하는 피리소리입니다. 이 소리를 듣는 사람마다 함께 춤추어야 할 놀라운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피리소리를 듣고도 춤을 추지도 않았습니다.

피리소리에 춤추지 못하는 이유는 마음에 병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마음의 병은 죄로 인한 마음의 강퍅입니다. 죄는 사람의 마음을 강퍅하게 만들며 이것이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막아 그리스도안에서 누려야 할 기쁨을 빼앗아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로 예수님은 애곡해도 울지 않는 세대에 대해 책망하셨습니다. 이 비유는 세례요한의 회개의 경우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세례요한이 요단강에서 외치는 회개의 외침은 애곡이었습니다. 그의 책망은 회개할 줄 모르는 유대인들에 대한 애곡의 외침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이 메시야를 영접해야 할 일에 대한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지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 제사장들은 이를 비웃고 거부했습니다.

사람이 회개를 외칠 때 가슴을 칠 줄 알아야 합니다. 죄인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길은 한가지뿐입니다. 그 길은 바로 회개입니다. 애곡해도 울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하심을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기뻐할 때 기뻐하고 슬퍼할 때 슬퍼할 줄 아는 영적 감각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는 교훈은?

예수님의 행위에 대해서 바리새인들은 꼬투리 잡아 비난하는 흑색선전을 만들어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전하는 복음에도 기뻐할 줄 모르고, 회개를 외쳐도 애통해 할 줄 모르며 오히려 그런 것을 가지고 꼬투리를 잡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말씀에 어떻게 반응 합니까? 마음이 닫혀 있습니까? 열려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아멘으로 화답하며, 그 말씀을 내 마음에 온전히 받아 들여 감사해야 할 부분에서는 감사하고, 기뻐해야 할 부분에서는 기뻐하고, 통회해야 할 부분에서는 통해 할 줄 아는 심령이 열린 그리스도인이 다 되어야 하겠습니다.

찬송:54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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