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10:30-42 내 이웃은 누구인가? 325장
10:3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10: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10: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10:33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10: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10:35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10:36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10: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10:38 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10:39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10:40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10:41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10:42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오늘 말씀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의 말씀과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입니다.
- 30-37절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시험하려든 한 율법사가 이제 예수님에게 질문을 합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고 물었습니다. 그가 이 같은 질문을 한 이유는 그 사실이 정말로 궁금해서 질문한 것이 아니라, 바리새인들의 생각에는 그들의 이웃이 바리새인들이라고 규정하고 있었으며 율법을 잘 지키는 유대인들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어떻게 대답 하는가를 듣고 싶어서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율법사의 질문에 매우 지혜로우신 비유로 대답하셨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다고 했습니다. 그 강도는 이 사람을 붙잡고 소지품을 빼앗았을 뿐 아니라 그 옷까지 벗겼습니다. 그리고 때리기까지 하여 거반 죽게 만들고는 그 사람을 고갯길에 버려 둔 채 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마침 그 길로 제사장이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제사장이란 하나님 앞에 백성들의 속죄 제물을 드리는 사람입니다. 그는 가장 자비해야 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에 모범을 보여야 할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이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도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이 사람은 당장에 누가 손을 써 주지 않으면 생명이 위독한 사람인데도 그대로 피하여 지나친 것입니다. 이 제사장은 율법으로 영생을 얻는다고 믿고 있으면서도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시는 율법의 강령을 내 던져버린 것입니다.
그 후에 다른 한 사람이 지나가게 되었는데 레위인이였다고 했습니다. 레위인 은 성전에서 제사장을 보좌하고 성전의 기물을 보관 운반하는 역할을 하고 또 율법을 가르치는 일을 담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레위인도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는 피하여 지나가 버렸습니다. 율법을 가르치는 레위인들 조차 율법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예수님은 이 비유로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사마리아인이 여행 중 거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사마리아인은 먼저 지나간 제사장이나 레위인과는 달랐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그를 돌보아 주었을 뿐 아니라 끝까지 책임졌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사마리아인을 등장시키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마리아인은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입니다. 유대인들이 천히 여기는 존재입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은 불쌍히 여기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강도 만난 사람을 피하여 그냥 가 버린 이유는 그들에게 강도 만난 사람에 대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그를 불쌍히 여겼다고 했습니다.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죄인을 불쌍히 여기심에서 출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도 불쌍히 여기심에서 비롯되셨습니다.
그리고 이웃에 대한 사랑은 실천적인 사랑입니다. 사마리아인은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줬을 뿐 아니라 돈까지 주었으며 더 소용되는 여비까지 주겠노라고 약속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잇는 것은 율법의 완성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지 못한 자가 어떻게 율법을 지킨자라고 말 할 수 있겠습니다.
주님은 율법사에게 “누가 이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냐?”고 물으셨습니다. 이 물으심은 오늘에도 나에게 똑같이 적용됩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하십니다.
- 38-42절은 마리아와 마르다에 대한 말씀입니다.
38절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마르다의 영접으로 집에 들어서시자 의자에 앉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동생 마리아는 언니처럼 마중 나가지 못하고 집에서 예수님을 대접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가 남은 일은 언니에게 미루고 예수님 발아래 앉았습니다.
마리아는 주의 말씀에 갈급한 심령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주님을 기뻐한 이유 중 하나가 그의 말씀을 사모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분주하신 일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자기 집에서 오래 지체치 못하실 줄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잠시 그 짧은 시간에 어떻게 하면 그의 말씀을 들을 것인가? 초조한 마음으로 예수님 발 앞에 앉아 말씀을 듣게 된 것입니다. 마리아의 말씀을 듣는 태도가 아름다웠습니다. “발아래 앉았다”고 했습니다. 마리아의 이 같은 태도는 말씀을 받아들이는 겸손한 자세입니다. 아마 그는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한마디도 놓칠 새라 고개를 쳐들고 입을 주목했습니다.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 말씀을 듣는 일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런데 40절에 보면 언니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했다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대접하기 위해 분주한 것입니다. 그러다가 예수님 발 앞에 앉아 있는 동생을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자기는 분주스레 일하고 있는데 동생 마리아는 한가로이 방안에서 말씀만 듣고 있는 것이 못마땅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마리아에게 명하여 나를 도와주게 하라고 말함니다.
예수님은 마르다를 위로해 주셨습니다. 마르다의 봉사는 주님을 위한 것이므로 그가 하고 있는 일은 좋은 일입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라고 하시는 정다운 음성에서도 마르다에 대한 주님의 사랑이 넘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고 위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마리아는 좋은 편을 택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세상에서 가장 좋은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어느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그 일을 모든 삶에서 우선순위로 두고 귀하게 여길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는 교훈은?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예수님께서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는 말은 실천하라는 말입니다. 제사장이라 레위인처럼 아무리 율법을 많이 알고 있다 할지라고 실천하지 않으면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율법의 기본 정신은 사랑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의 말씀은 많이 알지만 그 말씀을 삶에 적용시키는 실천의 문제가 약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삶에 적용하고, 실천하며 사는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찬송:204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