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11:14-26 바알세불의 논쟁 46장

11:14 예수께서 한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을 쫓아내시니 귀신이 나가매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는지라 무리들이 놀랍게 여겼으나

11:15 그 중에 더러는 말하기를 그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고

11:16 또 더러는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니

11:17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지며 스스로 분쟁하는 집은 무너지느니라

11:18 너희 말이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만일 사탄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11:19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 재판관이 되리라

11:20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11:21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11:22 더 강한 자가 와서 그를 굴복시킬 때에는 그가 믿던 무장을 빼앗고 그의 재물을 나누느니라

11:23 나와 함께 하지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11:24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11:25 가서 보니 그 집이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11:26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귀신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한 곳에서 벙어리 귀신에 매어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을 고쳐 주셨습니다. 벙어리 귀신이란 귀신이 벙어리란 것이 아니라 그 사람으로 벙어리가 되게 만든 귀신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귀신은 선천적이 아닌 어떤 기회에 벙어리 되게 한 일종의 악령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벙어리가 귀신의 역사라고 본다면 절대 안 됩니다. 이렇게 귀신은 사람의 몸에 들어와서 혹은 벙어리로 고통을 당하게도 하기도 한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하여 두 가지 형태로 나누어지게 되었습니다. 한 형태의 무리는 그 하시는 권능을 기이히 여겼던 사람들이 있었고, 또 다른 한 형태의 무리는 저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비방했습니다.

예수님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그 귀신을 쫓아냈다고 비방한 사람들은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지금 친히 예수님의 능력 행하심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귀신이 예수님의 명령에 떨면서 쫓겨 나가는 일과 귀신에게 눌려 있었던 사람이 온전한 몸으로 고침 받은 사실을 직접 목격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그렇지 않다고 부인 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예수의 이 같은 권능이 어디서 나온 것이냐? 그들은 부득이 이 문제에 대한 어떤 결론을 내야 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궁여지책으로 사단의 역사일 것이라는 결론을 낸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에 대한 시기와 미움에서 나온 고의적인 비방이었습니다.

그리고 16절을 보면, 이들 중에 또 어떤 이들은 예수님께 하늘로서 온 표적을 구했다고 했습니다. 이들이 요구한 ‘하늘로서 오는 표적’은 엘리야가 불이 떨어지게 한 것이나, 모세의 불기등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는 ‘예수가 다욋의 자손’이라면, 과연 메시야로서의 자격을 중명할 수 있어야 되지 않겠는가 하는 요구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요구는 귀신을 쫓아내는 권세보다 더 큰 능력을 요구하여 예수님을 궁지에 빠뜨리려는 술책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이들의 불신앙과 교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17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그들의 이 같은 잘못된 생각을 아시고 그들에게 이처럼 이르셨습니다.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지며 스스로 분쟁하는 집은 무너지느니라 너희 말이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만일 사탄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한마디로 사단이 귀신을 쫓아내면, 사단의 나라는 스스로 무너져 버릴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20절에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고 말씀 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하였다고 하시는 선포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으로 이미 이 땅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사단의 권세를 물리치시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시는 일은 하나님 나라가 임한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21절 이하에서 지금까지의 그의 논조를 더 한층 강화하는 확증적인 한 예를 들고 계시는데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킨다고 하신 말씀입니다. 여기서 ‘강한 자’는 ‘사탄’을 상징합니다. 또한 ‘집’은 세상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소유’는 사탄이 지배하는 사람과 가치들을 말합니다. 이것은 사탄이 비록 인류를 실질적으로 다스릴 권리를 갖지는 않았지만,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하나님의 허용 아래서 매우 강력하게 인간 세상을 지배하는 권세를 지니고 있음을 시사해 주는 말입니다.

그런데 22절에 보면, ‘더 강한 자가 와서 그를 굴복 시킨다’고 말씀 합니다. 여기서 ‘더 강한 자’는 예수님 자신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마귀의 시험에서 이기셨을 뿐만 아니라, 사역을 통해 사탄의 세력을 물리치셨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승리하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종말론적으로 재림을 통해 영원하고도 완전한 승리를 이루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의 무장을 빼앗고, 그의 재물을 나눈다’고 말씀 합니다. 이는 인간의 영혼을 지배하는 사탄의 능력과 영향력을 빼앗고, 주님께서 사탄의 모든 지배권에서 성도들을 벗어나게 한다는 것으로 예수께서 오셔서 이 세상에 대한 사탄의 영향력을 파쇄하시고 죄와 사망의 포로로 잡혀 있던 사람들을 해방시키실 뿐만 아니라 새 생명을 얻어 누리게 하심을 말합니다.

그런데 사람에 게서 나간 귀신은 여러 곳으로 돌아다녀 보았지만 그가 이전에 거했던 그 타락하고 부패했던 사람의 마음과 같이 편히 쉴 곳을 찾지 못하다 다시 옛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 와보니, 그 집이 청소가 되고 비어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께서 그 집에 거주하시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 집은 다시 귀신을 받아들이기에 좋은 상태로 유지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귀신이 자기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그 집으로 들어갔다고 말씀 합니다. 여기서 ‘일곱’이란 숫자는 유대인의 수 개념으로 볼 때 완전한 숫자입니다. 따라서 ‘일곱 귀신’이란 더 이상 생각해 볼 수도 없을 정도로 강력하고 악한 귀신이란 의미를 갖고 있다.

이 비유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자들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교훈 받게 됩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자들은 즉시 하나님의 영을 영접하여 그 마음을 지배하시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야 마귀의 유혹으로부터 승리하며 살아갈 수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는 교훈은?

본문은 한 사람으로부터 쫓겨난 귀신이 다시 들어갈 곳을 찾아 여기저기 다녀보다가 있을 곳을 찾지 못하자 전에 쫓겨났던 곳으로 가보았더니 그 집이 잘 청소되고 수리되었는데 주인이 없으므로 그 집에 들어가게 되어 그 사람의 형편이 처음보다 훨씬 더 심각해졌다는 말씀을 우리는 묵상했습니다. 그러므로 빈집은 위험합니다.

칼빈은 사람은 말과 같아서 누가 타느냐에 따라 가는 방향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누가 주인이 되어서 그 마음을 주장하느냐에 따라 그 삶의 모든 형편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자가 빈집입니까? 바로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지 않으면 빈집입니다. 그리고 새 주인이신 우리 주님이 우리를 주관하시도록 온전히 맡기지 않으면 빈집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고백하고 영접해 들였다면 이제 그 분이 나의 모든 삶, 인격, 생각, 언행을 주장하시도록 그 분에게 주권을 이양해 드려야만 빈집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은 예수의 영, 곧 성령이 인도하시고 이끌어 가시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예수의 영이신 성령이 여러분을 주관하시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말씀을 읽거나 들을 때 감동을 받고 그 말씀을 의지하고 순종하면서 내 의지를 버리는 것입니다. 이를 가리켜 성령충만이라고 합니다. 우리 모두 우리의 마음을 빈집으로 만들지 말고 성령 충만으로 예수님이 충만한 삶을 살아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찬송:19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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