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20:27-40 부활에 관한 논쟁 찬송 423장

20:27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인 중 어떤 이들이 와서

20:28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만일 어떤 사람의 형이 아내를 두고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20:29 그런데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아내를 취하였다가 자식이 없이 죽고

20:30 그 둘째와 셋째가 그를 취하고

20:31 일곱이 다 그와 같이 자식이 없이 죽고

20:32 그 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20:33 일곱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그 중에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20:34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20:35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은 장가 가고 시집 가는 일이 없으며

20:36 그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라

20:37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서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20:38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

20:39 서기관 중 어떤 이들이 말하되 선생님 잘 말씀하셨나이다 하니

20:40 그들은 아무 것도 감히 더 물을 수 없음이더라

앞 단락에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납세에 관한 정치적인 논쟁을 통해 예수님을 궁지에 빠뜨리려 했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음을 살펴보았습니다. 계속해서 본문에서는 사두개인들이 나서서 부활 문제를 통해 예수님을 공격하는 장면이 소개 됩니다. 사두개인들은 당시 로마 정부와 유화적인 관계를 맺은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경향의 사람들인데 예루살렘 귀족이나 대제사장 무리들로 대부분 구성되었습니다.

이들은 유대주의적 전통을 벗어버리고 모세 오경만을 인정하며 교리적으로는 내세나 부활 혹은 천사나 사탄과 같은 영적 존재를 믿지 않았고 인간의 자유 의지를 강조하였습니다.

이들의 28절부터 보면, 계대 결혼에 대해서 말하면서 그것을 부활과 관련시켜 예수님에게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이 계대결혼은, 결혼한 형제가 후손을 보지 못하고 죽었을 경우에 다른 형제가 죽은 형제의 아내를 취하여 형제의 대를 잇고 여자를 돌보는 제도입니다.

그런데 사두개인들은 모세 오경을 신봉하는 자들답게 신25:5-10절에 기록된 모세의 규례를 제시하면서 만약 부활이 있다면 부활 후에 계대 결혼을 한 사람들의 혈통 관계는 어떻게 되는가에 대하여 질문을 제기한 것입니다.

즉, 모세오경에 언급된 계대 결혼 제도를 근거로 예수께서 가르치는 부활 교리가 논리적으로 모순이 있음을 밝힘으로써 예수님의 교훈의 가치를 떨어뜨리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 질문의 내용은,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부터 막내까지 자식이 없음으로 한 여인을 그들의 아내로 삼고 마지막에는 그 여인마저 죽었습니다. 이런 경우, 한 여자에 남편은 일곱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만약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면 부활 때에 이 여인은 어느 남자의 아내가 될 것이냐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예수님을 그들이 의도한 함정에 빠트리기 위해 사두개인들이 단지 꾸며낸 이야기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오히려 저들의 질문이 몇 가지 오류를 지니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 그들은 성경을 편협하게 인용했고 이미 부활이 없다는 결론을 내린 후 질문하였기 때문에 현세와 내세를 동일한 상태라고 전제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질문 자체가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려는 것이기에 성경의 원래 의도를 무시한 채 자신들의 논리에 맞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신25:5-10의 계대결혼에 대한 규정은 부활에 대해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여자의 인권이 무시되는 사회에서 과부의 신분과 그의 남편이 속한 지파와 가문의 재산을 보호해 경제적, 신분적 불평등을 막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는 성경의 저작 의도면에서 볼 때 부활과는 연결시켜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부활 후의 상태 모습을 예시하셔서 사두개인들의 부활에 대한 무지함을 깨닫게 하십니다.

34절부터 보면, 부활 후에는 결코 결혼 제도가 존재하지 않으며, 죽음도 없을 뿐 아니라 사후 부활체의 삶의 양식이 어떠할지 암시해 주는 바, 그것은 천사와 같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즉 부활한 성도들은 더 이상 세상의 법칙에 지배를 받지 않고 새로운 하늘의 법칙에 따라 살게 될 것입니다.

특히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신봉하는 모세 오경을 인용해서 모세의 고백을 이용하여 부활의 실재를 확증하셨습니다. 즉, 출3:6은 모세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인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과거형이 아닌 현재형으로 표현하여 이 조상들이 죽어 없어진 존재가 아니라 지금도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살아있는 존재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과거의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현재 사실로서 하나님은 죽은 사람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결국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지금도 하나님을 경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 또한 영광스러운 부활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두개인의 영적 무지를 지적하는 예수님의 이러한 답변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살고 있는 그분의 자녀를 축복하고 보호하시지만 그들이 죽은 이후에도 그들을 향한 인자하심과 사랑하심을 영원히 멈추지 않고 그곳에서도 주신 언약을 성실히 이행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결국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 성도들이 부활하여 믿음의 조상들과 함께 영원한 영광에 참예할 것을 보여 주는 것으로 세상의 지혜와 지식으로는 알 수 없는 하나님 나라의 신비를 말해 줍니다.

이 주님의 말씀은 들은 그들은 어느 누구도 주님의 말씀에 반박할 자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편협한 지식을 주장하는 자가 아니라 미래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이 모든 일을 이루어 가실 하나님의 섭리에 감사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는 교훈은?

오늘 말씀에서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려 했지만, 이들은 결국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주님의 말씀에 아무 말도 못하였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예수님을 논리적으로 공격하려 하고, 신학적으로 비판하려 하며, 정치적으로 음해하려던 모든 시도는 다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은 그 어떤 세상의 지혜와 지식으로도 이길 수 없는 분이심이 온 천하에 드러났습니다. 오직 겸손과 감사와 순종으로 그를 주로 영접하는 것이 택하심을 입은 복된 이들의 지혜임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아무리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대적하며 그의 몸 된 교회를 비방하고 무너뜨리려 해도 우리 주님은 언제나 승리하시며 우리도 그 안에서 반드시 승리할 수 있음을 믿고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십니다. 이 땅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몸 된 교회를 대적하던 세력들은 모두 무너지고 결국은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부활의 주님을 믿고, 우리 역시 부활하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부활의 감격 속에서 주님의 오심을 맞고 우리가 분명히 승리하게 될 것이라는 믿음과, 그의 오심으로 영원히 누리게 될 하늘나라를 소망하며 큰 위로와 소망을 되찾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찬송:17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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