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20:1-9 사명자의 괴로움 찬송:197장

20:1 임멜의 아들 제사장 바스훌은 여호와의 성전의 총감독이라 그가 예레미야의 이 일 예언함을 들은지라

20:2 이에 바스훌이 선지자 예레미야를 때리고 여호와의 성전에 있는 베냐민 문 위층에 목에 씌우는 나무 고랑으로 채워 두었더니

20:3 다음날 바스훌이 예레미야를 목에 씌우는 나무 고랑에서 풀어 주매 예레미야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네 이름을 바스훌이라 아니하시고 마골밋사빕이라 하시느니라

20:4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너로 너와 네 모든 친구에게 두려움이 되게 하리니 그들이 그들의 원수들의 칼에 엎드러질 것이요 네 눈은 그것을 볼 것이며 내가 온 유다를 바벨론 왕의 손에 넘기리니 그가 그들을 사로잡아 바벨론으로 옮겨 칼로 죽이리라

20:5 내가 또 이 성읍의 모든 부와 그 모든 소득과 그 모든 귀중품과 유다 왕들의 모든 보물을 그 원수의 손에 넘기리니 그들이 그것을 탈취하여 바벨론으로 가져가리라

20:6 바스훌아 너와 네 집에 사는 모든 사람이 포로 되어 옮겨지리니 네가 바벨론에 이르러 거기서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너와 너의 거짓 예언을 들은 네 모든 친구도 그와 같으리라 하셨느니라

20:7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 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20:8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파멸과 멸망을 선포하므로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 거리가 됨이니이다

20:9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오늘 말씀을 핍박 받는 예레미야에 대한 말씀입니다.

1.1-6절은 바스훌이 예레미야를 핍박하는 내용입니다.

유다의 부패한 제사장들은 이전까지는 예레미야가 예루살렘 도처에서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고 다니는 것을 불쾌하게 생각하기는 했으나 그 예언이 자신들에게 직접 들려진 것이 아니었기에 직접적으로 예레미야를 박해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앞장에서 본 바와 같이 급기야 예레미야가 성전 뜰에서 직접 제사장들과 백성들의 귀에다 대고 유다의 죄악상과 그로 인한 멸망을 선포하자 사정은 달라졌습니다. 즉 예레미야의 예언에 양심이 찔리고 위기의식을 느낀 제사장들은 성전 질서 책임자였던 제사장 바스훌을 충동질하여 예레미야를 박해하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는 예레미야를 무력으로 박해한다고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 취소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더 큰 하나님의 저주를 초래할 뿐인 것이빈다.

결국 예레미야를 박해한 바스훌과 그 동료들은 유다의 멸망 경고뿐만 아니라 그들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가 그곳에서 처참한 최후를 맞게 될 것이라는 저주의 심판을 듣게 됩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신실한 하나님의 일꾼은 언제나 많은 대적들의 반대를 받으며 때로는 구체적인 박해도 받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인간의 부패한 속성은 진리에 반대되는 성향을 지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사는 성도들은 고난 받는 것을 이상히 여길 것이 아니며, 오히려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 된 자임을 깨닫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고난 받는 것을 기쁘게 여기며, 고난에 의연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 7-9절은, 예레미야가 고통을 하나님께 아뢰는 내용입니다.

예레미야가 심판의 메시지를 전해야 하는 자신의 선지자직에 대한 소명과 백성들의 박해로 인한 내적 갈등과 고통을 하나님께 토로합니다.

7절에 보면,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권유하셔서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권유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유혹하다’ ‘속이다’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주께서 나를 속이시므로 내가 그 속임에 넘어 갔습니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를 그대로 해석하면, 하나님을 속이시는 분으로 오해 할 소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함으로써 오는 현실의 곤고한 상황으로 인한 갈등을 묘사한 것으로, 예레미야 자신이 기대 했던 것과는 상반된 결과, 곧 백성들이 회개하기는커녕 더욱 악해지고 자신을 박해하는 결과가 나온 데 대한 절규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어떻게 하겠다는 것입니까? 9절에 이렇게 말씀 합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하나님의 심판의 경고가 백성들을 회개 시키는 것은 고사하고 그들로 하여금 더 악하게 만들고, 또한 자신에 대한 박해만 더 가중시키는 결과를 초래 하자, 차라리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전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일시적으로 갖게 되지만, 자신의 중심이 골수에 사무쳐 답답하여 견딜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 사실을 전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사도 바울이 ‘내가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고 한 말과 같은 맥락의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는 교훈은?

우리는 본문의 예레미야 선지자를 볼 때 안타까움과 함께 그의 사명에 대한 열정에 경외감을 느끼게 됩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그는 자신이 겪는 고초와 고독들보다도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는 것을 가슴에 사무치도록 답답하여 하였던 인물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뜨거움 마음들이 가득 했으면 참 좋겠습니다. 영혼이 멸망당하는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어서 그 사람에게 안타까운 마음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그런 사람 말입니다.

우리도 예레미야처럼 그 누구도 끄지 못할 뜨거운 구령의 열정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는 영혼들의 현재의 삶은 우리보다 더 행복한 듯해도 그들의 결국이 이처럼 비참하고 불행한 결과가 될 것인데, 진정으로 구원받은 성도라면 영원한 죽음과 멸망을 향해 달음질해 가는 저들을 향해 예레미야가 가졌던 것과 같은 구령의 열정으로 전도에 힘쓰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찬송:498장

댓글

Scroll to Top